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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riter: 황선웅 (Isaac)
    황선웅 (Isaac)
  • Jun 25, 2019
  • 2 min read

Updated: Nov 20, 2019

“미쳐야 미칠 수 있다"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뭔가 하나에 미쳐서 열심히 하면, 반드시 내가 세운 목표에 도달한다. 미친다는 뜻이다. 말놀이라고도 불리는 언어유희다. "사고를 쳐야 사고(思考)가 생긴다." 앞의 사고는 교통 사고할 때 사고이고, 뒤의 사고는 생각할 때 사고이다. “꿈꾸는 동안은 모두가 동안(童顔)이다” 같은 말도 좋은 예이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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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0:1-6 말씀은 흡사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하다. 바스훌이란 사람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는다. 성전의 경비대장 이었거나 고위 종교 지도자 (20:6, “너의 거짓 예언") 였을 것인데, 유다의 멸망에 관한 예레미야의 예언에 속된 말로 꼭지가 돌았다. 예레미야를 잡아다 때리고 나무 고랑에 채워놓았다 (6:2). 결박된 채로 밤새 폭행과 조롱을 당했다. 거의 반 죽음이 된 상태로 하루를 놔두고, 그 다음날 바스훌이 다시 와서 예레미야에게 말했을 것이다. 상상 가능한 가장 거만한 태도로, 예레미야의 턱을 잡고 얼굴을 들면서, “예언자 양반, 그 입 함부로 놀리다가, 진짜 죽는 수가 있어… 이번엔 우리 애들이 몸만 풀었는데, 다음번엔 이렇게 안 끝날거야. 알아서 처신해.”


고개를 들 힘조차 없는 예레미야였다. 터진 입술에 피가 고인 채로, 연신 기침을 하면서, 예레미야 입을 연다. “이름이 바스훌이라고 했소? 하나님이 마구르로 바꿔 주실거요.” 반전을 암시하는 기가 막힌 언어유희다! 히브리어 발음상으로 “파스후르 (바스훌)”이고, “풍요로 둘러싸인"이라는 뜻이다. 예레미야가 새로 준 이름은, “마구르" “사면에 덮인 공포, Terror on every side” 라는 뜻이다. 주변을 둘러 풍요가 가득했던 파스후르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마구르의 시대가 올 것이다. 공포가 사면에서 유다를, 또 교만한 바스훌과 그의 가족들을 덮을 것이다. [2]


“보라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그들의 원수들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네 눈은 그것을 볼 것이며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그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겨 칼로 죽이리라. … 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사는 모든 사람이 포로 되어 옮겨지리니 네가 바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20:4-6).


하나님의 뜻은 정해졌다. 회개하지 않으면 유다는 망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무리들이 있다. 예레미야의 입을 다물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못하게 하려는 세력, 백성의 귀를 막아버리려는 이들이 있다. 하나님이 이들에게 응답하시는 방식을 보라. 말놀이, 언어유희다. 악이 충만한 세상을 향한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자신감이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시 2:1-3). 이어지는 야훼 하나님의 응답을 들으라.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2:4).


예수님의 가상칠언 중 마지막 말이었던 tetelestai 에서도 같은 자신감이 느껴진다. 영어로는 보통 “It is finished” 라고 번역되는데, 간단히 옮겨보면, “끝났다”라는 말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여인들도 예수님의 고개가 마지막으로 떨구어지는 것을 보면서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이제는 다 끝났다…” 예수님을 어떻게든 잡아 죽이려 했던 이들, 예수 운동을 가장 악랄하게 방해했던 이들도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이제는 다 끝이다, tetelestai.” 주님 스스로도 같은 말씀을 하셨다. "It is finished."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이 전해주셨던 어떤 말씀보다 더 강력하고 분명하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예수의 주 되심을 증거하고 있다. 십자가 상의 죽음은 영광의 부활로 옮아가는 통로였을 뿐이다. 그리스도를 대적했던 이들의 눈에는 다 끝난 것이었다. “아 이제는 끝났다. It is finished.” “이제는 발 뻗고 잘 수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같은 응답이었다. "끝났다." 죽음이 지배하던 세상, 사람들이 죄에 종노릇하던 시대는 끝났다. 분열과 반목으로 갈라진 시간도 끝났다. 옛 질서는 끝났고, 새로운 질서가 도래했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1] 생태학자 유영만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ecologist&logNo=220652673396&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2] WBC 성경주석 26 예레미야 (상), 474-75.

  • Writer: 황선웅 (Isaac)
    황선웅 (Isaac)
  • May 24, 2019
  • 2 min read

Updated: Nov 20, 2019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보라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그 모든 성읍이 여호와의 앞 그의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으니" (예레미야 4: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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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창조는 혼돈 (Chaos) 가운데 질서를, 어둠 가운데 빛을 주신 사건이었습니다. 선지자의 눈에 비친 패역한 유다의 상황은 마치 창조 이전의 혼돈과 공허 또 어둠과 같았습니다. 질서로 채워져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그 세상은 온데 간데 없고, 인간이 초래한 무질서 즉 혼돈이 다시 채워진 세상, 원래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었는데, 유다의 범죄로 저주를 받은 땅, 황무지를 보면서 예레미야는 탄식하고 있습니다.


본래적 아름다움을 잃은 것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도 본래 모습을 잃고 아픔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몸을 버리시면서, 인간의 연약함과 악함이 감추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을 상상하셨을 것입니다.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유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주님은 꿈꾸고 계셨을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도 그렇지요. 하나님이 처음 지으신 아담이란 사람은 충직한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존재였지만, 타락 이후 인간은 죄 짓는 존재로 전락합니다. 동생을 질투하여 때려 죽이는 존재, 하늘에 닿고 자기 이름을 온 세상에 내기 원하는 교만한 존재, 인간안에 두신 하나님의 형상과 그분의 숨결은 빛 바랜 사진처럼 먼지 낀 액자에 단지 모셔져 있을 뿐입니다.


아마 그래서 하나님께서 포기 못하시는가 봅니다. 창조 직후에 보시기에 좋았던 그 세상을 하나님은 여전히 기억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참 모습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사도행전이 증거하는 참 교회의 모습이 여전히 그분의 눈에 어른 거리기 때문에.


다시 혼돈과 공허, 어둠이 가득한 세상이 되어 버렸지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사람이 다시 주님 앞에 돌아올 때까지,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한 소유로 거듭날 때까지,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 모든 사람, 세상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끝까지 사랑하는 것,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십니다.

  • Writer: 황선웅 (Isaac)
    황선웅 (Isaac)
  • Nov 28, 2018
  • 2 min read

Updated: Nov 20, 2019

Bad money drives out good.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는 경제학의 개념이 있다. 동일한 액면 가치를 지닌 두 개의 화폐가 유통된다고 하자. 첫번째 돈은 금 반 돈을 녹여 만든 <10만원>이라는 동전이고, 두번째 돈은 같은 <10만원> 동전인데, 속은 철이고 겉에 금 도금을 했다. 시장에 이 두 동전이 같은 액면 가치 (10만원) 로 유통된다면, 자연히 사람들은 순금 화폐를 집에 쌓아두고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는 무조건 순금 동전이 아닌 도금 동전을 사용할 것이다. 좋은 돈은 씨가 마르고, 나쁜 돈만 돌아다닐 것이다. 이것이 나쁜 돈 (도금 화폐) 이 좋은 돈 (순금 화폐) 을 시장에서 몰아내는 원리이다.


오늘 우리 시대의 기독교에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 시대는 나쁜 (일부보다 더 많은 수의) 대형 교회들이 좋은 교회 (보통 중소형) 들을 구축하는 시대이다. 나쁜 정치 목사들이 좋은 (조용하고 성실하게 자기 목회를 하는) 목회자들을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인들의 눈에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좋은 기독인들 보다는, 자기가 잘되는 일에만 혈안이 된 이기적 예수쟁이들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그저 하나의 이익 집단, 사회에 아무 도움도 필요도 없는 그런 쓸모없는 곳으로 교회가 전락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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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 http://www.thebricktestament.com

창세기 41장에 나오는 바로의 꿈을 떠 올려본다. 살진 암소도 일곱 마리, 앙상하게 뼈만 남은 암소도 일곱 마리였다. 그러나 바로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살진 소들을 먹어치운 뒤에도 여전히 말라 비틀어진 암소 일곱 마리뿐이었다. 무성하고 알찬 일곱 이삭도, 쭉정이가 된 마른 이삭 일곱에게 먹혀서 없어졌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이대로 끝나지 않았다. 희망을 집어 삼켜버린 절망으로 이 꿈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꿈을 꾸는 한 사람을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켰다.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현재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절망은 단지 새로운 기독교를 향한 전환점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분의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교회안에 여전히 그 분의 빛이 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새로운 비전은 여전히 교회안에 있다.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 거룩한 하나의 공 교회를 위해 준비된 꿈쟁이들이 일어날 것이다. 꿈꾸는 자들이 속히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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