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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riter: 황선웅 (Isaac)
    황선웅 (Isaac)
  • Nov 19, 2019
  • 3 min read

Updated: May 29, 2020


Martyrdom of the Maccabees, by Ciseri, Antonio.

PC: Britannica entry "Martyr"


본문이 말씀하는 두 증인이 누구인지는 불분명하다. 혹자는 포로기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했던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떠 올리기도 하고, 6절 말씀을 통해 엘리야와 모세를 떠 올리기도 한다. 이들이 누구를 가리키든지 간에, 그들은 말씀을 맡은 자들이며 (5절,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하나님의 권세를 받아 이 세상에서 권능을 행하는 자들이다 (3, 6절).


여기까지는 좋다. 성도의 고통과 환란을 계속 다뤄 온 계시록의 스토리 라인에서, 두 증인의 등장은 뭔가 짜릿한 역전승을 암시하기까지 한다. 드디어 하나님이 새로 시작하시는 세상의 끝이 오는 것인가? 박해의 시간이 드디어 끝난 것인가? 그러나 엉뚱하게도 (anticlimactic) 두 증인은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7절). 유대 문화가 중요시하는 적절한 장사 예법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채, 두 선지자의 시신은 사람들의 비웃음 거리가 된다.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11:7-10).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읽고 있었을까? 아마 두 선지자에 자신들의 상황을 대입해 보고 있었을 것이다. 죄로 오염된 땅에서, 성도들은 마치 하나님앞에 선 두 감람나무나 두 촛대와 같은 존재였다 (4절). 그들에게도 주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이 있었고, 공동체 안에서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바뀐 것은 하나도 없다. 그들은 결국 짐승과 같은 로마 제국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고,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을 비웃고 조롱할 것이다. 슬프지만, 이것이 성도의 운명이고, 교회의 운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이 상황에서 기억해야 하는 사명이 있으니, 7절이 말씀하는대로, “증언을 마치는 것 (when they have finished their testimony)”이다. 파국적 결말을 맞게된다 할지라도, 끝까지 증언해야 한다.


증언이라는 말의 그리스어 단어는 μαρτυρία (영어 음역: marturia)인데, 이 단어에서 martyrdom (순교)라는 말이 나왔다. 순교자는 martyr 라고 한다. 죽음을 통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이 순교이다. 사도 바울도 사도행전 20장에,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말했다. 뒤집어 보면 증언이란 끝까지 하는 것,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많은 분들이 생각났다. 우리가 좋은 말로 독립운동이라고 부르지만, 실상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로 현대화 된 군 체계와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 선조들은 독립의 당위성과 끈기 외에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채 그들과 싸워야 했다.


1932년 1월, 일본이 중국 본토를 침공한다. 중국이 30만 대군으로 결사항전했으나 상하이를 일본에 내 주고 만다. 3개월 뒤인 1932년 4월에 일본이 상하이 점령을 축하하면서 대규모 행사를 갖는데, 이것이 바로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졌던 홍커우 공원 기념 행사였다. 윤봉길은 이 거사를 통해, 당시 상하이 파견군의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폭살하고, 또 다른 몇 명을 제거하고, 일본 군 정치 지도자들에게 큰 상해를 입혔다.


윤봉길의 의거에 깊은 감명과 도전을 받은 인물이 당시 중국의 장제스 총통이었다. 그는 “중국의 100만 대군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청년 하나가 해냈다”고 격찬했다고 한다. 윤봉길의 의거는 2차 대전 이후 한국이 독립국의 지위를 받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카이로에서 미국, 영국, 중국의 대표가 만나 2차 대전 이후 식민지 문제를 논의했다. 당시 영국은 인도를 미국은 필리핀을 (거의) 식민지배하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에 반대했다. 서구 열강은 미영중 삼자 신탁통치를 제안했다. 그러나 장제스 총통이 고집스레 조선의 독립을 주장했고, 이는 윤봉길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줄기찬 항일 운동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윤봉길 의사가 의거 이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믿음장인 히브리서 11장은 아벨의 믿음을 이와같이 말씀한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받았으니…” 이 구절 말미에 이렇게 말씀한다.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믿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사는 삶에는 좋은 결과뿐 아니라 오히려 고통이 따를 수도 있다. 로마의 박해 시대는 증언의 결과로 죽음이 주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본문은 분명히 말씀한다. 성도의 사명은 끝까지 증언하는 것이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증언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불분명한 결과 앞에서도 사명을 놓지 않는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성도는 죽기까지 믿음의 증언을 남긴다.

  • Writer: 황선웅 (Isaac)
    황선웅 (Isaac)
  • Jun 25, 2019
  • 2 min read

Updated: Nov 20, 2019

“미쳐야 미칠 수 있다"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뭔가 하나에 미쳐서 열심히 하면, 반드시 내가 세운 목표에 도달한다. 미친다는 뜻이다. 말놀이라고도 불리는 언어유희다. "사고를 쳐야 사고(思考)가 생긴다." 앞의 사고는 교통 사고할 때 사고이고, 뒤의 사고는 생각할 때 사고이다. “꿈꾸는 동안은 모두가 동안(童顔)이다” 같은 말도 좋은 예이다. [1]

예레미야 20:1-6 말씀은 흡사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하다. 바스훌이란 사람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는다. 성전의 경비대장 이었거나 고위 종교 지도자 (20:6, “너의 거짓 예언") 였을 것인데, 유다의 멸망에 관한 예레미야의 예언에 속된 말로 꼭지가 돌았다. 예레미야를 잡아다 때리고 나무 고랑에 채워놓았다 (6:2). 결박된 채로 밤새 폭행과 조롱을 당했다. 거의 반 죽음이 된 상태로 하루를 놔두고, 그 다음날 바스훌이 다시 와서 예레미야에게 말했을 것이다. 상상 가능한 가장 거만한 태도로, 예레미야의 턱을 잡고 얼굴을 들면서, “예언자 양반, 그 입 함부로 놀리다가, 진짜 죽는 수가 있어… 이번엔 우리 애들이 몸만 풀었는데, 다음번엔 이렇게 안 끝날거야. 알아서 처신해.”


고개를 들 힘조차 없는 예레미야였다. 터진 입술에 피가 고인 채로, 연신 기침을 하면서, 예레미야 입을 연다. “이름이 바스훌이라고 했소? 하나님이 마구르로 바꿔 주실거요.” 반전을 암시하는 기가 막힌 언어유희다! 히브리어 발음상으로 “파스후르 (바스훌)”이고, “풍요로 둘러싸인"이라는 뜻이다. 예레미야가 새로 준 이름은, “마구르" “사면에 덮인 공포, Terror on every side” 라는 뜻이다. 주변을 둘러 풍요가 가득했던 파스후르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마구르의 시대가 올 것이다. 공포가 사면에서 유다를, 또 교만한 바스훌과 그의 가족들을 덮을 것이다. [2]


“보라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그들의 원수들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네 눈은 그것을 볼 것이며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그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겨 칼로 죽이리라. … 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사는 모든 사람이 포로 되어 옮겨지리니 네가 바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20:4-6).


하나님의 뜻은 정해졌다. 회개하지 않으면 유다는 망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무리들이 있다. 예레미야의 입을 다물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못하게 하려는 세력, 백성의 귀를 막아버리려는 이들이 있다. 하나님이 이들에게 응답하시는 방식을 보라. 말놀이, 언어유희다. 악이 충만한 세상을 향한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자신감이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시 2:1-3). 이어지는 야훼 하나님의 응답을 들으라.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2:4).


예수님의 가상칠언 중 마지막 말이었던 tetelestai 에서도 같은 자신감이 느껴진다. 영어로는 보통 “It is finished” 라고 번역되는데, 간단히 옮겨보면, “끝났다”라는 말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여인들도 예수님의 고개가 마지막으로 떨구어지는 것을 보면서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이제는 다 끝났다…” 예수님을 어떻게든 잡아 죽이려 했던 이들, 예수 운동을 가장 악랄하게 방해했던 이들도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이제는 다 끝이다, tetelestai.” 주님 스스로도 같은 말씀을 하셨다. "It is finished."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이 전해주셨던 어떤 말씀보다 더 강력하고 분명하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예수의 주 되심을 증거하고 있다. 십자가 상의 죽음은 영광의 부활로 옮아가는 통로였을 뿐이다. 그리스도를 대적했던 이들의 눈에는 다 끝난 것이었다. “아 이제는 끝났다. It is finished.” “이제는 발 뻗고 잘 수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같은 응답이었다. "끝났다." 죽음이 지배하던 세상, 사람들이 죄에 종노릇하던 시대는 끝났다. 분열과 반목으로 갈라진 시간도 끝났다. 옛 질서는 끝났고, 새로운 질서가 도래했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1] 생태학자 유영만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ecologist&logNo=220652673396&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2] WBC 성경주석 26 예레미야 (상), 474-75.

  • Writer: 황선웅 (Isaac)
    황선웅 (Isaac)
  • May 24, 2019
  • 2 min read

Updated: Nov 20, 2019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보라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그 모든 성읍이 여호와의 앞 그의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으니" (예레미야 4:23-26)


하나님의 창조는 혼돈 (Chaos) 가운데 질서를, 어둠 가운데 빛을 주신 사건이었습니다. 선지자의 눈에 비친 패역한 유다의 상황은 마치 창조 이전의 혼돈과 공허 또 어둠과 같았습니다. 질서로 채워져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그 세상은 온데 간데 없고, 인간이 초래한 무질서 즉 혼돈이 다시 채워진 세상, 원래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었는데, 유다의 범죄로 저주를 받은 땅, 황무지를 보면서 예레미야는 탄식하고 있습니다.


본래적 아름다움을 잃은 것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도 본래 모습을 잃고 아픔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몸을 버리시면서, 인간의 연약함과 악함이 감추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을 상상하셨을 것입니다.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유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주님은 꿈꾸고 계셨을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도 그렇지요. 하나님이 처음 지으신 아담이란 사람은 충직한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존재였지만, 타락 이후 인간은 죄 짓는 존재로 전락합니다. 동생을 질투하여 때려 죽이는 존재, 하늘에 닿고 자기 이름을 온 세상에 내기 원하는 교만한 존재, 인간안에 두신 하나님의 형상과 그분의 숨결은 빛 바랜 사진처럼 먼지 낀 액자에 단지 모셔져 있을 뿐입니다.


아마 그래서 하나님께서 포기 못하시는가 봅니다. 창조 직후에 보시기에 좋았던 그 세상을 하나님은 여전히 기억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참 모습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사도행전이 증거하는 참 교회의 모습이 여전히 그분의 눈에 어른 거리기 때문에.


다시 혼돈과 공허, 어둠이 가득한 세상이 되어 버렸지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사람이 다시 주님 앞에 돌아올 때까지,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한 소유로 거듭날 때까지,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 모든 사람, 세상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끝까지 사랑하는 것,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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