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은 현존하는 신약성경 사본 중 가장 권위있는 사본 중 하나입니다. 4세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신약성경 거의 대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바티칸 사본의 히브리서 1:3 옆에는 필경사(scribe)가 추가한 것으로 보이는 경고문이 달려 있습니다. 


ἀμαθέστατε καὶ κακέ, ἄφες τὸν παλαιόν, μὴ μεταποίει

Fool and knave, leave the old reading and do not change it! 

멍청하고 나쁜놈아, 성경 본문을 바꾸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인쇄술이 나오기 전까지 성경은 필경사들이 손으로 옮겨 적어 만들었습니다. 필경사들의 임무는 원본(original copy)과 똑같은 사본(manuscript)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어떤 필경사들은 창의적으로 일에 접근했던 것 같습니다. 혹시 사본을 만들다가 이야기 전개에 방해가 되는 단어가 나오면 일부러 빠트리기도 하고, 혹은 이야기 진행을 더 매끄럽게 할 수 있다면 한 문장을 추가하기도 했습니다. 바티칸 사본에 달린 무서운 경고문이 나오게 된 배경입니다. 


말씀을 바꾸려는 시도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회개라는 단어 혹은 죄라는 단어가 강단에서 실종되었습니다(저도 책임감을 느낍니다). 복이나 축복이라는 단어는 원래보다 남발되고 있습니다. 순교나 선교, 헌신도 찾아보기 힘든게 사실이지요. 사랑이란 말은 하나님께 받는 것으로만 배우지 서로 실천해야 하는 것 또 교회 밖으로 흘려보내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잘 안 들리는 것 같습니다. 


지난주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하는 사람은 그 집을 바위 위에 지은 사람과 같다”라는 말씀을 전하면서 저도 마음이 찔렸습니다. 실제로 #그대로 행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하는 질문 + 자기합리화도 마음에 있었고요. 그래선지 주님은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말씀하시면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자기 사랑을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말씀에 나온 여러가지를 다 그대로 세세하게 지킬 수는 없을지라도 하나님과 이웃, 나 자신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걷기를 힘쓴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제 삶에 살아 숨쉬는 인생, 그래서 바위 위에 지어진 흔들리지 않는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The Jewish Annotated New Testament로마서 서론에서 인용 및 발번역, 254쪽.


"바울은 그가 소아시아에서 걷은 헌금을 예루살렘에 전달하기까지 로마에 갈 수 없었고, 이것은 로마서 집필의 직접적 동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급히 이 서신을 전하고자 했던 배경에는 로마 교회 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간의 갈등이 있었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온전한 구원이 허락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반대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저들의 태도로 인하여 분노해 있었다.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마침내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선택)의 직분을 잃게 되었고 자신들이 그 잃어버린 지위를 새로이 계승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 사도는 이방인 교인들의 주장이, 하나님의 복음 확장에 기여하기는 커녕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구원의 계획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한편 또한 그들의 잘못된 태도를 교정하기 위해 본 서신을 쓴 것으로 보인다. 바울의 주장은 이방인 교인들이, (할례 등을 통해) 혈통상 유대인이 되지 않으면서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게 된 이 놀라운 사실이, 결국에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게 하리라는 것이다. 본래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모든 유대인들이 이 일에 동참하기를 바라셨고 현재는 열방을 향한 바울의 사역을 통해서 성취되고 있다. 바울은 이방인들조차도 죄에서 벗어나서 의에 이르는 것을 유대인들이 보게 되면, 그들 또한 결국에는 이 복음을 증거하는 일(자신들이 원래 부름받았던 그 일)에 동참하기를 원하게 될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구원은 일견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불순종에서 비롯되었고, 또한 모든 유대인들이 구원을 얻게 하려는 하나님의 본래의 계획은 반대로 이방인들의 유대인 공동체를 향한 겸손과 존경 여부에 큰 영향을 받는다 (역자 주: 그러니까 두 그룹이 화해해야만 하나님의 복음을 확장시킬 수 있다. 결론: 화해하라!). 바울은 본래 모든 유대인에게 맡겨진 일 (모든 인류를 한 분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는 일) 을 가장 성실하게 감당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하나님의 본래적 구원 계획은 결국 바울의 사역을 정당화 하는 역할을 한다 (영어 원문은 하단을 참조하세요)."



문제 상황: 교회 내 그룹간 갈등

1) 뭔가 엄청난 내용을 읽은 것 같은데 머리 속에 하나도 안 남은 것 같다. 간단하게 풀어보자. 먼저 바울은 로마를 방문한 적이 없다. 다만 로마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과 그들의 훌륭한 신앙과 열정에 대해 들었다. 여러 상황으로 인해 그의 로마 방문길이 막히게 되자, 바울은 먼저 이 서신을 보냈다. 가서 해결하고 싶었지만 교회 내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언제 방문할 수 있을지 그의 계획은 계속 어그러지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2) 로마 교회 내에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두 집단이 있었다. A)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아마 이스라엘 본토에서 나고 자랐고 그들의 정통 유대교 정체성을 매우 자랑스러워하던 이들이었다. 율법, 할례, 안식일 등이 이들에게는 중요한 가치였다. B)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어떻게 어떻게 신앙을 갖게 되었지만 유대교적 배경이 전무한 헬라 세계의 사람들이었다. 아람어니 히브리어니 관심도 없었고, 그들이 믿게 된 예수님과 다수의 초기 교인들이 유대인이었다는 것 외에는 유대교와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1. 우리 시대의 두 가지 종류의 마블 영화팬을 생각해 보라. A) 마블 코믹스 시절의 만화책부터 시작해서 자연스레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영화팬이 된 사람들: 이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이런 불평을 던진다. “인크레더블 헐크는 만화책이 훨씬 재미있는 것 같아. 영화에서는 스토리 라인을 너무 많이 수정해서 헷갈릴 정도였어.” “아이언맨 만화책에서는 ____ 었는데, 영화에서는 그 부분을 통째로 날려 버려서 어이가 없었다.” B) 마블이라곤 영화밖에 모르는 마블 영화팬들: 나도 이 중 한 명인데, 마블 만화책이 있었다는 것도 영화를 보고 한참 뒤에야 알았다. 내게는 마블 영화가 내가 아는 마블 세계관의 전부이다. 솔직히 마블 만화책에는 별로 관심 없다.

3) 대립의 내용: 먼저 유대계 기독교인들은 한 마디로 프라이드가 강했고 이방인 교인들을 무시했다. 그들은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온전하게 임할 수 있다는 복음의 진리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방인 교인들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기독교 복음과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낡아빠진 구약 이야기 혹은 혈통 이야기로 자신들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꼬웠다. 급기야 이방인 출신 기독교인들은 대체 이론(replacement theory)을 주장하기까지 했다. 촛대가 옮겨졌다는 주장이었는데, 아주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정하고 예수님을 죽인 것이 유대인 아니었는가. 그런데 너희들만 구원을 받는다고? 우리는 안 된다고? 시대가 바뀌었다는 주장이었다.

바울의 교정:

1) 바울은 구약에 나타난 마지막 때에 유대인들에게 주신 임무를 상기시킨다. 하나님의 본래 설계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바와 같이, 너희를 통해 모든 민족이 복 받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임한 복에 안주하지 말고 모든 열방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도록 부름받은 이들이었다.


2)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부르심을 저버렸고, 지금 그 일은 오히려 바울의 사역과 이방인들을 통해 수행되고 있다. 이는 유대인들의 꽉 막힌 시야를 넓혀주는 일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들에게도 임할 수 있구나!’ ‘아 이것이 우리 유대인들에게 주신 본래적 사명이었구나!’ 이를 통해 마침내 유대인들도 그들에게 주신 소명, 즉 만민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뛰어들게 될 것이다.


3) 따라서 두 그룹은 하나의 사명안에 서로 묶여 있다. 유대계는 이방인들이 필요하다. 그들의 믿음을 보고 도전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본문의 표현을 빌자면 이방인들의 믿음이 그들을 “시기나게 할 것이다" 롬 11:11, 14). 반대로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이 필요하다. 그것이 하나님의 본래적 설계였기 때문이고 그들이야말로 복음을 증거하는 이 사명의 주역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Photo Credit: Jewishwebsight.com



Introduction to the Letter of Paul to the Romans, Jewish Annotated New Testament, p. 254.


“Since Paul cannot get to Rome until he has brought to Jerusalem the collection he has been gathering from among the nations in the Greek east, he writes to prevent further deterioration in the relationships between Christ-follower Gentiles, who are resentful that their claims for full inclusion are not accepted, and the Jews who refuse to accept them. These Gentiles are tempted to presume that they are replacing some Israelites, as if those Jews have lost God’s favor. Instead of helping the gospel to succeed, Paul claims their attitudes threaten to undermine God’s designs, and Paul writes to change their attitudes. Now that they have accepted the gospel, and thus have acknowledged the God of Israel -- without going through the process of becoming Jews/Israelites by undertaking the rite of proselyte conversion (“circumcision” of males) -- these non-Jewish followers will help persuade his fellow Jews to see that God’s plan for the salvation of all is being fulfilled in Paul’s ministry to the nations without the Jews’ participation in this privileged task, entrusted to all Israelites at the end of the ages. When they see these non-Jews turning from sin to righteousness, as expected in the awaited day to come, his fellow Jews will then want to emulate him in proclaiming the good news (“gospel”) of the arrival of that day to the nations. Thus the salvation of the Gentiles is in part contingent on the original “not persuaded” response to the mission expressed by some Jews, and the salvation of all Israel is contingent on the Gentiles’ humble and respectful attitude toward that Jewish community, thereby validating Paul’s claim to be carrying out Israel’s awaited role of turning all humankind to the One Creator God worshiped among the Jewish People.”

The Reason for God by Timothy Keller

Chapter 5, “How Can a Loving God Send People to Hell?”

[요약] 티모시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

5장,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실 수 있는가?”



PC: https://bellatorchristi.com/2016/07/31/review-of-the-reason-for-god-by-dr-tim-keller/


기독교의 중심 가르침에 내포된 긴장

  1. 두 가지 중심 교리: 사랑의 하나님과 공의의 하나님이 서로 양립 가능한가?

  2. 만약 어떤 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지옥에 던져지기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과연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은 이들을 같은 권리와 존엄성을 가진 인간으로 차별없이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1. 이 질문은 혹시 통제 (control) 와 관련된 이슈인지도 모른다 (pp. 72-74).

  1. C.S. 루이스는 Abolition of Man 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근대 이전에는]… 어떻게 인간의 의지 (soul) 를 현실 세계에 복종시킬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은 지식과 절제, 도덕성이었다. … 그러나 오늘날은 반대로 어떻게 인간의 욕망을 위해 현실 세계를 억누를 수있는가가 핵심 질문이 되었다. 해결책은 기술 (technology) 이다…”

  2. 켈러: “궁극적 현실 (ultimate reality) 은 더 이상 초자연적인 질서로 간주되지 않고, 단지 인간이 조작 가능한 자연 세계 (natural world) 로 이해되고 있다. 우리의 욕망을 꺾어 현실 세계에 맞추려는 시도 대신, 우리는 이제 현실 세계를 우리의 욕구에 맞게 조작하고 통제하려 노력하고 있다.” J.R.R. 톨킨이 집필한 반지의 제왕 은 인간이 지혜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기쁨을 버리고, 힘과 통제를 갈구했을 때 발생하는 결과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3.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이 세계 내에서 가진 개인적 권리를 너무나 깊이 신봉한 나머지 최후 심판의 날이라는 생각 자체를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4. 켈러는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왜 정죄와 심판이라는 개념은 거부하면서 하나님의 용서라는 가르침에는 똑같이 분노하지 않는가? 라고 말이지요. 인간이 자기를 바꾸는 것을 거부한 체. 세계를 조종하고 통제하려 한다는 켈러의 관점에서 미루어 보면, 사실 심판이나 용서나 똑같이 기분 나쁜 개념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결정에 의존해서 우리의 미래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2. 폭력적 하나님의 필요성 (pp. 75-78)

  1.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과 공의의 하나님이 같은 분이실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랑으로 가득한 이들도 때로는, 그들이 가진 사랑때문에 분노에 휩싸일 때가 있다. 생각해 보라, 만약 누군가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해하려 하는 것을 보게 된다면 어떻겠는가? 베키 파이퍼는 “분노는 사랑의 반대가 아니다. 증오야말로 사랑의 반대이다. 그리고 증오의 끝은 무관심이다.”라고 말한다.

  2. 미로슬라브 볼프는 “만약 하나님이 부정의나 속임수에 분노하지 않으시고, 폭력을 끝내 종식시키지 않으신다면, 그같은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실 자격이 없다. … 비폭력주의의 실천은 신적인 보복(보수)에 대한 믿음을 필요로 한다.”라고 말한다. 그는 또한 “오히려 하나님의 보수하심에 대한 불신앙이 은밀하게 폭력을 부추긴다”고 덧붙인다.

  3. 보수하시는 하나님과 최후 심판에 관한 믿음은 사실상 더 이상의 폭력을 생산하는 일을 자제하게 하는 토대이며, 인간의 사랑과 평화를 위한 실천의 중요한 근본이 된다.

3. 지옥에 관한 새로운 관점 (pp. 78-82).

  1. 지옥에 관해 사람들이 가진 일반적인 이해는 이렇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시간을 주시되, 인간이 생애 동안 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면 우리의 영혼을 영원히 지옥에 던지신다는 것이다.

  2. 하지만 지옥은 자기 주도적 자기 파괴 과정 (a self-driven process) 인지도 모른다. 죄는 우리를, 모든 기쁨과 사랑, 지혜와 선한 것들의 원천인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킨다. 우리가 그분의 임재를 완전히 잃어버린다면, 그것 그 자체로 지옥일 것이다. 지옥은 말하자면 우리 영혼이 자기 안에 함몰된 채 자기 중심적 삶을 계속해서 영위해 온 궤적 (trajectory of a soul) 에 불과하다.

  3. 간단히 말하면, 지옥은 개인이 자유롭게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채로 영원히 살기로 작정한 채 받아들인 정체성일지도 모른다.

  4. C.S. 루이스는 말했다. “세상에는 오직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 — 하나님께, ‘주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는 이들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말씀하는 이들이다.”

  5. 지옥이 이처럼 과정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그 누구의 영적인 상태도 이미 결정이 끝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4.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개념의 근원 (pp. 84-86)

  1. 성경외의 그 어떤 종교적 텍스트도 하나님이 사랑과 기쁨으로 세계를 지으셨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많은 수의 고대 종교들이, 신들이나 초자연적 세력들 사이의 갈등과 폭력적 싸움의 결과로 인해 이 세계가 만들어졌다고 믿었다. 불교와 이슬람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명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 분과 개인적 관계를 갖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2.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경에서 왔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우리의 배우자로 부르는 것에 대해, 하나님을 개인적이고 친밀한 방법으로 아는 것에 대해서, 또 그 분의 사랑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 강력한 방식으로 우리의 마음에 부어진 것에 대해 말한다. 이같은 개념에 대한 증거는 자연 질서 가운데에서도 찾을 수 없고, 역사적으로도 거의 확인 불가능하며, 기독교외의 여타의 종교 경전으로도 뒷받침할 수 없다.

  3. 이 성경이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 또한 마지막 때에 이 세계의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실 공의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한다.



*페이지 번호는 영문판을 따랐습니다.

@All Rights Reserved. 2023.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