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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주간 미국 사회 전체는 극렬한 분열로 나뉘었습니다. 찰리 커크의 죽음 이후 정치와 종교계가 보인 반응 때문입니다. 보수 정치권과 기독교계는 찰리 커크를 자유민주주의의 영웅으로 또 순교자로 추앙하는 한편, 다른 입장을 가진 이들은 커크가 생전에 했던 발언들에 주목했습니다. 평소 정치적 사안에 대해 최대한 언급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지난 주, 한 목사의 트윗을 보고 교인분들께 제 생각을 나누는 것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 폭력은 용인될 수 없다. 우리 안에는 본성적 악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악함은 내 눈에 있는 들보보다 상대방의 눈에 있는 티끌에 주목하게 하고, 그 티끌 때문에 그 사람의 인격 전체를 없애고자 합니다. 에스더에 나오는 하만이라는 악당도 그랬습니다. 모르드개가 맘에 들지 않으면, 모르드개 한 사람만 죽이면 되는데, 하만은 모르드개가 속한 민족 전체를 다 죽여야 분이 풀린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판을 키우게 되고, 몰락의 길로 갑니다. 찰리 커크의 생전 발언에 대해 가치판단이 다를 수는 있지만, 공개 석상에서 한 사람을 이토록 폭력적으로 죽이는 것은 우리 사회가 결코 용인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커크가 어떤 사람이었든지, 그의 자녀들이 자라서 이 끔찍한 장면을 보게 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논쟁이지 전쟁이 아닙니다.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둥글둥글함이지, 생각이 다른 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모서리가 아닙니다.

  2. 커크는 순교자가 아니다. 마크 드리스콜 목사는 찰리 커크 암살 이후 소셜미디어에 다음과 같은 글을 게시했습니다. If your church didn’t address, the demonic murder of Charlie Kirk this weekend, the pastor is a coward and needs to repent or resign.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마크 드리스콜 목사를 좋아합니다. 책도 읽었고, 설교도 여러 편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의 말씀을 듣고 책을 읽을 예정입니다. 하지만 이 글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address”는 설교 중 이 사안을 언급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커크의 죽음을 순교자적 죽음으로 추앙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한국 초기 교회사에도 비슷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감리교 최초의 선교사로 1885년 조선에 들어온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의 죽음과 관련된 것입니다. 1902년 아펜젤러는 성서 번역 위원회 회의 참석을 위해 일본으로 가는 배편에 올랐습니다. 그의 배는 목포 부근에서 일본 선박과 충돌했고, 그는 이 사고로 죽었습니다. 감리교 계통의 목회자들이나 학자들은 아펜젤러의 죽음을 “순교”라고 표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펜젤러의 죽음이 “순교”가 아닌 “순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순교(martyrdom)라는 말은 “증언하다(to bear witness)”라는 뜻의 그리스어 마르투레오(μαρτυρέω)에서 왔습니다. 기독교 전통은 순교라는 단어를, 믿음을 위해 죽음을 택한 극단적 상황에 제한해 왔습니다. 권력자들에 의해 배교나 개종을 강요받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다가 죽음도 불사한 이들만을 좁은 의미로 가리켜 순교자(martyr)라고 불러왔습니다.  커크는 공개적으로 자기 신앙을 표현하고, 자기 정치적 견해를 믿음과 결합시키곤 했습니다. ‘믿음을 공개적 자리에서 증거하다가 죽었으니 순교가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기독교 역사가 전통적으로 순교라고 불러온 죽음과는 몇 가지 점에서 다릅니다. 1) 순교자들은 권력에 믿음으로 정면 도전했던 이들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존재는 황제를 신으로 여겼던 로마 제국의 권력자들이나 공산주의 독재자들의 권력 유지에 방해물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면서 하신 “다 이루었다 It is finished”라는 말은 사실은 로마의 권력자들이 했던 말이기도 합니다. “끝났다. 저 예수라는 놈이 초래하는 혼란이 이제 다 끝났다.” 하지만 커크는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한 현재 권력의 지지를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2) 신앙을 증거하다가 어떤 불이익을 겪었는가도 생각해 볼 점입니다. 믿음 때문에 권력자들에 반항하던 신앙인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거나 옥고를 치렀습니다. 세례 요한, 본 회퍼, 주기철. 폴리캅 등은 고문을 비롯한 비인간적 대우를 견뎌야 했습니다. 가문 전체가 찍혀서 자식들의 출세길이 막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커크는 “증언”을 통해 오히려 성공가도에 올랐습니다. 재산은 급격히 불어났고,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가 당한 비참한 죽음을 보며 기독교인들이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라는 점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커크의 죽음에 대한 반응이 진짜 교회와 가짜 교회를 판별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애도되고 기억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전통이 인정하는 순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3.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따로 있습니다. 1) 싸움을 그치는 일입니다. 진짜 교회와 가짜 교회를 나누고, 아군과 적군으로 찢는 일을 그만둬야 합니다. 나와 생각은 다르지만 같은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고, 이 나라의 시민들입니다. 선 긋기를 멈추고, 화합해야 합니다. 2) 모든 죽음에 관심을 갖는 일입니다. 내가 추앙했던 사람의 죽음, 또 나와 입장이 다른 사람들의 죽음, 사실은 모두 같은 생명의 죽음이며, 하나님의 시선에서는 모두 안타까운 죽음들입니다. 조롱할 수 있는 죽음은 없습니다. 애도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마음을 다해 위로해주세요. 3) 기도해 주세요. 또 그 얘긴가 하실 수도 있지만, 저는 기도보다 더 강력한 무기를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 외에는 이런 것들이 나타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사회의 치유와 화합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찰리 커크 때문에 애도하는 이들을 위해 가족들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이 같은 폭력이 더 일어나지 않는 사회가 되게 기도해 주세요. 

  • Writer: 황선웅 (Isaac)
    황선웅 (Isaac)
  • Mar 27, 2024
  • 1 min read

스턴건(stun gun)이라는 별명을 가진 김동현 선수는 UFC에 처음 진출한 한국인 파이터입니다. 코리안 좀비 정찬성 선수 이전에는 한국이 자랑하는 격투기 선수였고, 은퇴 이후에는 왕성한 방송 활동을 하고 있지요. 그런 김동현 선수에게 전국의 초등학생 중학생들이 온라인 상에서 메시지를 보낸다고 합니다. “형, 팬이에요.” “멋있어요!” 이런 메시지가 아니라, 반말로 “김동현 싸움 좀 하냐?” “나랑 계급장 떼고 한 판 붙자.” 이런 내용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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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님도 앎이 무엇인지 묻는 제자에게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바로 앎이다.” 즉, 자기 지식의 한계를 아는 사람이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얼마나 아는가를 자랑하기 바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만, 진정한 앎은 우리가 모르는 게 무엇인지 깨닫는 데서 출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주 새신자반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데 장애물이 되는 것들 중 하나가 “악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선하시고 전능하시다면, 지금 우리 세상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왜 그냥 놔두시는 것일까요?’ ‘애초에 왜 악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들어온 것일까요?’ 등의 질문들이지요. 다만, 우리가 쉽게 범하는 실수 한 가지가 있는데, 그 악의 문제로부터 우리를 분리하는 것입니다. 마치 ‘나는 깨끗하고 거룩한 사람으로, 개관적으로 이 세상의 악을 관찰하고 있다…’ 이런 식의 접근입니다. 우리도 그 악과 한덩어리입니다. 우리도 그 악의 원인이고 결과입니다. 따라서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 첫 걸음은 우리가 먼저 은혜 앞으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죄인임을 인정하면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이 세상을 바꾸는 일꾼으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지난주 설교에 소개했던 드라마 로망스(2002)의 명대사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 우리 입장에서 이 말을 다시 써 본다면 어떨까요? 글쎄요… “난 학생이고, 그쪽은 선생님이시네요.” 정도 되지 않을까요.

  • Writer: 황선웅 (Isaac)
    황선웅 (Isaac)
  • Mar 27, 2024
  • 2 min read

사순절이 어느새 저물고 있습니다. 어제 토요일(3/16)이 40일 중 28일 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신약 통독도 어느새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끝내고 바울서신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기간 상으로도 또 분량 상으로도 2/3 지점에 와 있습니다. 거의 끝에 와 있는 것은 감사하지만, 긴 여정에 지쳐 길 옆에서 잠시 쉬고 계신 분들도 보이고, 아예 경주를 포기한 분들도 계신 것 같습니다. 한 분도 포기하지 않으시도록 몇 가지 격언들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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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t of the important things in the world have been accomplished by people who have kept on trying when there seemed to be no hope at all.” — Dale Carnegie

“이 세상의 중요한 일의 대부분은 소망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도전했던 이들이 이룬 것들이다.” — 데일 카네기


“It ain’t over till it’s over.” — Yogi Berra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 요기 베라


”Winners never quit, and quitters never win.” — Vince Lombardi 

“이기는 사람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포기하는 사람들은 절대 이기지 못한다.” — 빈스 롬바르디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이 말이 남았습니다: “포기는 배추를 셀 때나 쓰는 말이다.“ 


몇몇 교우들과 함께했던 다이어트 챌린지가 지난 월요일에 끝났습니다. 저는 운동은 많이 못 하고 끼니를 줄였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레귤러 코크는 1월 1일에 한 캔을 마시고 올해 전혀 마시지 않았습니다(부활의 주님과 다시 한 캔을 마시려 합니다). 1월 중순까지 탄산의 유혹이 심했고 그 이후로는 괜찮았었는데, 다이어트 챌린지가 끝난 이번 한 주간, 콜라를 마시고 싶은 유혹이 그 어느 때보다 강했습니다.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한 캔 정도야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고자 할 때 우리는 여러 핑계를 만듭니다. 몸이 힘들다… 삶에 여러가지 스트레스 받는 일들이 겹친다… 너무 바쁘다… ‘안 그래도 힘든 데 더 나를 힘들게 하지 말자’ 하는 생각이 들 겁니다. 바로 그때가 우리의 의지를 증명할 때입니다. 한 발짝이라도 더 나아가세요. 포기하지 마시고, 계속 걸어 갑시다. 종점이 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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