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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2장 10절의 말씀을 NIV 성경은, "For we are God's handiwork, created in Christ Jesus to do good works, which God prepared in advance for us to do." “Handiwork”라고 번역된 원어 단어가 ποίημα (포이에마)인데, 시(poem)라는 말이 이 단어 포이에마에서 왔다. 그런 점에서 10절을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 받은 “하나님의 시”라고 번역하면 어떨까.

시는 행복과 기쁨만을 담지 않는다. 시는 고통과 좌절, 탄식과 분노도 담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으로 쓰고 계신 시가 시편 150편과 같은 찬미의 시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하늘)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어디 그뿐인가 때로는 우리 삶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울부짖는 시편 22편과 같을 때도 있다. 하지만 반드시 기억하라. 기쁨의 시든 탄식의 시든 내 삶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써내려 가시는 작품(ποίημα)이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절대 버리지 않으신다. 이것을 붙들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자기 확언(self-affirmation)’ 혹은 ‘자기 암시(self-talk)’를 성공을 부르는 습관으로 본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철학과 신념 또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는데, 이를 길러주는 한 방법으로 매일 거울을 보면서 자기 스스로에게 말해주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나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라든지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등의 낯간지러운 말을 해 보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 확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의 말을 스스로에게 계속 들려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라고 매일 소리 내어 고백해 보면 어떨까. 부정적 언어가 싫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분의 계획을 이루신다”라든지 “신실하신 하나님은 모든 약속을 지키신다”라고 말해보자. 좌절스러운 상황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고백해보라. 믿기 때문에 고백할 때도 있지만, 믿어지지 않아서 믿어질 때까지 고백해야 할 때도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지음 받은 “하나님의 시”다. 하나님은 작품을 만드시는 중이다.


Updated: Feb 20, 2022

예수님은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도 관심을 갖고 계셨던 것 같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죽이고 희생자들의 피를 제물에 섞어 드린 일로 대화하고자 하셨고(1절),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사고에 대해서도 알고 계셨다(4절).

The Agony in the Garden (about 1458-60, Giovanni Bellini)


사람들은 결과론적 관점에서 이 일들을 평가하고 있었다. 억울한 죽음도 모자라 이방 제사의 제물이 된 일도, 또 망대에 깔려 황망한 죽음을 맞은 것도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카르마든 섭리든 사람들은 제 나름대로 이유를 내고 설명해 보려 했다.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저들을 손가락질하면서 자신들의 죄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사건에 대한 합리적 원인에 대한 물음은 이내 자기합리화로 변질되었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 본다. 우리는 그들의 아픔을 먼저 헤아리기보다 원인을 생각하고 재빨리 논리를 만들어내는 데만 급급하지는 않은지. 비극적 사고의 디테일에 함몰된 채, 우리에게 남아있는 회개나 성찰의 몫을 등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3절에 기록된 주님의 외침이 마음에 살아온다. “I tell you, no! But unless you repent, you too will all perish.” 주님은 5절에도 똑같은 말을 반복하신다. (죽음을 당한 이들이 너희보다 더 죄인이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내가 답해주마, 아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도 모두 죽을 것이다.” 예언서의 패턴이 생각난다. 열방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은 많은 경우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심판 이후에 등장한다. 내가 먼저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비극적 사건에 대한 원인보다 저들의 고통을 헤아리고, 내가 져야 할 회개의 짐을 생각하며 겸손할 일이다. 손가락을 들어 남을 가리키기 보다 내 눈에 있는 들보를 어떻게 뺄 것인지 먼저 생각해야 할 일이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따르면, 자연 상태의 인간은 불안과 공포의 지배 하에 삽니다. 홉스는 이런 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The war of all against all)"이라는 유명한 말로 요약했습니다. 규율도 없고 통제도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개인이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대환장 상황이 "자연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한편 인간 모두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권리가 있는데, 이를테면 자유와 같은 것입니다. 홉스는 인간이 자연 상태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자기 권리를 희생하여 사회적 계약을 통해 국가를 탄생시킨다고 보았습니다. 욥기 41장에 나오는 리워야단(리바이어던)처럼 강력한 힘을 가진 국가에 자기 권리를 이양하고 국가가 제공하는 안전을 선택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홉스는 강력한 국가, 특히 현명한 인물이 다스리는 강력한 군주제 국가를 신봉했습니다. 지혜로운 군주가 다스리는, 리워야단 같은 막강한 힘을 가진 국가를 이상적 상태로 본 것입니다.



욥기 41장에 하나님께서 리워야단에 대해 길게 설명하십니다. 의도는 10절에 나옵니다. "... 아무도 [리워야단을] 격동시킬 만큼 담대하지 못하거든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

욥이 당한 상황은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욥이 제기하는 신학적 질문도 타당해 보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의인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고통을 주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런 통치가 의롭다고 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어찌 이렇게 행하실 수 있습니까?' '왜 제게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급하다고 바늘 허리에 실을 맬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욥의 상황이 안타깝고 억울하지만 그렇다고 담대하게 리워야단을 격동시킬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대항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맞지 않은 것 같아도, 그 크신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조금만 알 뿐이고 부분적으로 이해할 뿐입니다. 그래서인지 욥은 42장에 가서 자기가 앞서 제기한 질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2장 3절). NIV는 "... I spoke of ... things too wonderful for me to know(너무나 엄청난 일이라 제가 알 수도 없는 것들을 제 입에 담았습니다)"라고 풀었습니다.


팬데믹이라는 리워야단과 싸우고 있습니다. 경제 위기, 공급망의 위기, 구인난... 어디 그뿐인가요. 건강, 가정, 자녀, 생업 등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그 큰 일들 앞에 우리는 억울해 하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 상황을 통해 문제를 초월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경험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대항할 수 없는 리워야단을 애완동물처럼 다루시는 그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혹시 그래서 이런 어려움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은 아닌가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감히 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을 높여 드립니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계획을 깨트리시고 하나님의 가장 선하신 뜻을 이루시옵소서.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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