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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riter: 황선웅 (Isaac)
    황선웅 (Isaac)
  • Feb 13
  • 2 min read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모세가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기도가 얼마나 능력 있었으면 손을 드는 것만으로도 전투의 판도가 달라졌을까. 모세는 대단한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가 부러운 이유 또 한 가지는, 기도의 결과가 바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손을 들고 기도하면 전투가 유리해지고, 손을 내리면 불리해졌다. 기도하고 안 하고의 차이가 삶에 확 나타났던 것이다.



우리 삶은 어떤가. 기도를 열심히 해도 내 삶에 그렇게…? 바뀌는 것이 없어 보인다. 기도를 안 해도… 글쎄… 그닥 달라지는 것 같지 않다. 기도하고 기도하지 않고에 따라 가시적 결과가 분명히 보인다면, 이것보다 더 강력한 도파민 분비 물질이 있을까. 변화가 바로바로 나타나는데, 신이 나서 더 기도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의 기도는 그렇지 않다.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기도하든, 하지 않든 삶은 비슷해 보인다. 내 기도는 능력이 없는 걸까 의심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꼭 기억해야 하는 한 가지가 있다. 기도하는 이유다. 왜 기도하는가. 응답받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다. 삶의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도하는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과 사귀기 위해서다. 하나님과 데이트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무당이나 램프의 지니가 아니다. 우리의 기도에 꼭 응답하셔야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그대로 들어주셔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분은 우리보다 높으신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왕이시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그분을 알기 위해서다. 선하신 그분께 우리를 맡기기 위해서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기도의 목적이다.


물론 이런 기도는 우리를 변화시킨다.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 삶에 끌고 온다. 우리 기도가 강력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선하셔서 그렇다. 기도를 통해 우리가 선하신 하나님께 가까워져서, 그분의 능력이 우리 삶에 더욱 온전히 나타날 수 있게 되어서 그런 것이다. 그래서 변화도, 응답도 일어난다. 하나님이 선하셔서 그렇다. 중보기도는 무엇일까. 그 하나님의 선하신 능력을 다른 이들을 위해 비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들의 삶에도 나타나도록, 더 분명히, 더 완전히 나타나도록 기도하는 것이 중보기도다.


본문으로 돌아가면, 모세는 피곤하여 팔을 도저히 들 수 없을 때까지 손을 들고 기도했다. 더이상 팔을 올릴 수 없을 때까지 기도했다. 전투는 10분 20분 하고 끝나지 않는다. 12절에도 해가 질 때까지 이어졌다고 말씀한다. 일방적으로 이겨서 하루 온종일 걸려 끝났다는 얘기다.


모세는 팔을 도저히 들 수 없을 때까지 팔을 들고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올려드렸다. 하나님은 모세의 그 마음을 아시고,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이기게 하셨다. 우리도 오늘 그렇게 기도해보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온전히 의지하면서 기도하자. 그리고 저들을 향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자. 하나님의 선한 능력이 내 삶에도 또 저들의 삶에도 충분히 나타나도록 기도하자.

  • Writer: 황선웅 (Isaac)
    황선웅 (Isaac)
  • Jul 18, 2022
  • 2 min read

에베소서 2장 10절의 말씀을 NIV 성경은, "For we are God's handiwork, created in Christ Jesus to do good works, which God prepared in advance for us to do." “Handiwork”라고 번역된 원어 단어가 ποίημα (포이에마)인데, 시(poem)라는 말이 이 단어 포이에마에서 왔다. 그런 점에서 10절을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 받은 “하나님의 시”라고 번역하면 어떨까.

시는 행복과 기쁨만을 담지 않는다. 시는 고통과 좌절, 탄식과 분노도 담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으로 쓰고 계신 시가 시편 150편과 같은 찬미의 시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하늘)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어디 그뿐인가 때로는 우리 삶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울부짖는 시편 22편과 같을 때도 있다. 하지만 반드시 기억하라. 기쁨의 시든 탄식의 시든 내 삶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써내려 가시는 작품(ποίημα)이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절대 버리지 않으신다. 이것을 붙들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자기 확언(self-affirmation)’ 혹은 ‘자기 암시(self-talk)’를 성공을 부르는 습관으로 본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철학과 신념 또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는데, 이를 길러주는 한 방법으로 매일 거울을 보면서 자기 스스로에게 말해주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나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라든지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등의 낯간지러운 말을 해 보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 확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의 말을 스스로에게 계속 들려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라고 매일 소리 내어 고백해 보면 어떨까. 부정적 언어가 싫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분의 계획을 이루신다”라든지 “신실하신 하나님은 모든 약속을 지키신다”라고 말해보자. 좌절스러운 상황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고백해보라. 믿기 때문에 고백할 때도 있지만, 믿어지지 않아서 믿어질 때까지 고백해야 할 때도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지음 받은 “하나님의 시”다. 하나님은 작품을 만드시는 중이다.


  • Writer: 황선웅 (Isaac)
    황선웅 (Isaac)
  • Feb 19, 2022
  • 1 min read

Updated: Feb 20, 2022

예수님은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도 관심을 갖고 계셨던 것 같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죽이고 희생자들의 피를 제물에 섞어 드린 일로 대화하고자 하셨고(1절),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사고에 대해서도 알고 계셨다(4절).

The Agony in the Garden (about 1458-60, Giovanni Bellini)


사람들은 결과론적 관점에서 이 일들을 평가하고 있었다. 억울한 죽음도 모자라 이방 제사의 제물이 된 일도, 또 망대에 깔려 황망한 죽음을 맞은 것도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카르마든 섭리든 사람들은 제 나름대로 이유를 내고 설명해 보려 했다.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저들을 손가락질하면서 자신들의 죄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사건에 대한 합리적 원인에 대한 물음은 이내 자기합리화로 변질되었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 본다. 우리는 그들의 아픔을 먼저 헤아리기보다 원인을 생각하고 재빨리 논리를 만들어내는 데만 급급하지는 않은지. 비극적 사고의 디테일에 함몰된 채, 우리에게 남아있는 회개나 성찰의 몫을 등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3절에 기록된 주님의 외침이 마음에 살아온다. “I tell you, no! But unless you repent, you too will all perish.” 주님은 5절에도 똑같은 말을 반복하신다. (죽음을 당한 이들이 너희보다 더 죄인이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내가 답해주마, 아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도 모두 죽을 것이다.” 예언서의 패턴이 생각난다. 열방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은 많은 경우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심판 이후에 등장한다. 내가 먼저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비극적 사건에 대한 원인보다 저들의 고통을 헤아리고, 내가 져야 할 회개의 짐을 생각하며 겸손할 일이다. 손가락을 들어 남을 가리키기 보다 내 눈에 있는 들보를 어떻게 뺄 것인지 먼저 생각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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