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3:1-5 묵상, 타인의 고통 앞에서
- 황선웅 (Isaac)
- Feb 1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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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Feb 20, 2022
예수님은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도 관심을 갖고 계셨던 것 같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죽이고 희생자들의 피를 제물에 섞어 드린 일로 대화하고자 하셨고(1절),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사고에 대해서도 알고 계셨다(4절).

The Agony in the Garden (about 1458-60, Giovanni Bellini)
사람들은 결과론적 관점에서 이 일들을 평가하고 있었다. 억울한 죽음도 모자라 이방 제사의 제물이 된 일도, 또 망대에 깔려 황망한 죽음을 맞은 것도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카르마든 섭리든 사람들은 제 나름대로 이유를 내고 설명해 보려 했다.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저들을 손가락질하면서 자신들의 죄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사건에 대한 합리적 원인에 대한 물음은 이내 자기합리화로 변질되었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 본다. 우리는 그들의 아픔을 먼저 헤아리기보다 원인을 생각하고 재빨리 논리를 만들어내는 데만 급급하지는 않은지. 비극적 사고의 디테일에 함몰된 채, 우리에게 남아있는 회개나 성찰의 몫을 등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3절에 기록된 주님의 외침이 마음에 살아온다. “I tell you, no! But unless you repent, you too will all perish.” 주님은 5절에도 똑같은 말을 반복하신다. (죽음을 당한 이들이 너희보다 더 죄인이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내가 답해주마, 아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도 모두 죽을 것이다.” 예언서의 패턴이 생각난다. 열방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은 많은 경우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심판 이후에 등장한다. 내가 먼저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비극적 사건에 대한 원인보다 저들의 고통을 헤아리고, 내가 져야 할 회개의 짐을 생각하며 겸손할 일이다. 손가락을 들어 남을 가리키기 보다 내 눈에 있는 들보를 어떻게 뺄 것인지 먼저 생각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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