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게 써 놓았던 것들을 모아 놓았습니다.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부르심"이다. 1절,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사도 apostolos 라는 그리스어 단어도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부르심과 연관되어 있다. 바울은 또한 예수님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분으로 묘사한다. 4절, “성결의 영으로는 …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NIV 는 appoint 라는 단어를 쓰는데, 파송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으니, 결국 부르심이다.
부르심에 대한 이같은 논의는 이제 편지를 받는 이들에게로 확장된다. '이 편지를 쓰는 나 사도바울도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심을 받은 (선포되신) 분이시고, 편지를 읽고 있는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6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절에 계속된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즉 성도를 향하신 (이 편지를 읽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은 두 가지이다. 1) 예수 그리스도의 것, 2) 그분의 성도 (his holy people). 앞으로 이 책에서 밝혀지겠지만, 나의 어떠함 때문에 혹은 내가 무슨 대단한 일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불러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주권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우리 앞에 놓여진 도전이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도전이다. 내 현재 모습과 상관없이, 내 삶에 벌어지고 있는 어떤 일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부르시는 것을 믿는 것. 그리고 그렇게 사는 도전이다. 나는 예수님의 것입니다. 나는 그 분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2. 로마서 1:8-17, "피차 받는 위로"
윈-윈이라는 말("win-win strategy")은 미국의 국가 안보 전략에서 유래했다. 미국이 전쟁 상황에서 당면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태평양과 대서양, 두 대양 너머 양쪽에 적을 두는 일이다. 한 쪽에서 이기더라도 다른 한 쪽에서 진다면, 결국은 안보는 위태로워진다. 그러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양쪽 전선에서 대적을 상대하더라도 이길 수 있도록, 압도적인 군사력을 준비하고자 하는 것이 윈-윈전략이다. 지금은 그 의미가 확대되어 상생을 뜻하는 말로 널리 쓰이고 있다. 이해당사자 한쪽이라도 손해를 보게 된다면 둘 다 지는 것이라 생각하는 태도, 즉 서로 다른 주체이지만 한 운명 공동체임을 인정하는 표현이다.
본문에서 바울은 로마 교인과 그의 관계를 철저히 호혜적 윈윈 관계로 정의한다.
1) 먼저 로마 교회 교인들이 바울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
11절, "...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3절, "...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15절,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이어지는 16-17절에 바울이 믿는 복음에 대해 나온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즉,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사를 로마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을 굳건하게 하고 열매 맺는 신앙인이 되게 하고자 한다.
2) 이 관계성을 통해 바울 자신도 복을 받을 것이다.
12절, "이는 곧 ...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8절에 바울은 로마 교우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으로 인하여 감사한다. 바울의 로마 방문을 통해 복음의 전파가 가속화 될 것이고, 이는 바울에게 더욱 넘치는 감사를 안겨줄 것이다.
3) 이것이 끝이 아니다.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신다.
16절, "...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즉,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하나님의 능력과 의를 드러내고 높이는 일이다.
성도간에 맺어진 모든 관계는 결국 윈-윈-윈 이어야 한다. 나도 좋고, 남도 좋고, 하나님께도 기쁨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교회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 동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 하지만 둘 다 신앙생활에서는 멀어졌다. 윈-윈-루즈 인 셈이다. 미국의 안보 전략을 다시 생각해 보라. 한 곳에서라도 진다면 결국 우리 모두 지게 된다.
이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평신도 지도자로 섬기던 이들의 간증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맡겨진 사역에 대해 부담스러워 하고 있었고 힘겨워 하고 있었다. 교육과 훈련의 기회가 늘 부족하다고 느꼈고, 이는 자연히 자신에 대한 낮은 영적 자존감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동의하는 것이 두 가지 더 있었다. 하나는, 자기가 맡은 영혼들이 바뀌고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의 마음에 늘 새로운 소망이 생겨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가장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어 부족한 중에도 새해마다 다시 리더로 사명자로 결신하게 한다고 했다. 둘째는, 헌신하면서 자신의 신앙이 성장했다는 사실이었다. 예수님께서 우리 삶에 이루신 가장 아름다운 윈-윈-윈의 예들이었다.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바울은 확신에 차 있다. '우리가 함께 신앙을 나누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은 나와 여러분 모두에게 승리입니다. 또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께도 승리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창세기 12:3). 모든 이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는 그 복을 전하는 청지기들로 부름받았다.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 가운데 하나님의 복이 부어지기를!
3. 로마서 1:18-25, "죄의 본질: 교환"
18절에서부터 죄의 결과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는데, 한 마디로 표현하면 교환(exchange)이다. 23절이 말씀하는대로, 영원한(immortal) 하나님의 영광을 스러지는(mortal) 우상으로 바꾼 것이 첫째, 25절이 지적하는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꾼" 것이 둘째다.
비유하자면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은 바가지를 쓰면서 살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특별한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보배의 가치를 모른 채 보석을 엿바꿔 먹은 셈이다. 교환이 일어났는데 가치가 비슷한 두 물건이 오고 간 게 아니라 완전히 사기를 당한 것이다.
24절에 가장 뼈 아픈 교환이 나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NIV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정욕에 내어 주셨다(gave over)고 말씀한다. 원래 하나님의 소유여야 하는 우리를 본능의 노예로 살아가게 내버려 두셨단다. 말하자면 소유주가 바뀐 셈인데, 인간은 참 주인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몸의 욕망을 주인삼아 종노릇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왜 세상에 오셨어야만 했는가. 거꾸로 뒤집힌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기 위해 오셨다. 더 이상 "내 버려둘" 수 없어서, 더는 지켜볼 수 없어서, 하나님 그 분의 것인 우리들을 되찾기 위해 오셨다. 그리고는 우리가 하나님 대신 택한 싸구려들을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다시 보배같은 은혜를 되돌려 주셨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와 "엿바꿔 먹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받은 물질과 시간 건강을 내어드려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을 버리고 허망한 것들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물에 분명히 보이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20절)을 보는 눈을 주시길 기도한다.
4. 로마서 1:26-32,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악은 선의 결핍이다"라고 했던 성 어거스틴의 말이 생각난다. 사실 영적 진공상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이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상태는 없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28절), 인간의 마음은 타락한 생각, "a depraved mind"으로 가득차게 되고 이는 합당하지 않은 행동으로 자연히 이어지게 된다.
15년 전 교회 수동 봉고차로 운전 연습을 하던 것이 생각난다. 어떻게 어떻게 면허는 땄지만 언덕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나였다. 그래서 새벽에 일찍 일어나 교회 봉고차를 (거의 훔쳐서) 경사가 심하고 차량통행이 뜸한 곳에서 혼자서 연습을 했던 기억이 있다. 평지에서는 가속페달이나 브레이크를 밟지 않아도 차가 정지해 있지만 언덕에서는 다르다. 앞으로 올라 가든지 뒤로 굴러 떨어지든지 두 가지 밖에는 없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본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인간은 악을 행할 수밖에 없다고 선언한다.
말씀이 주시는 소망이 있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the knowledge of God)이 회복되면 우리에게 죄가 무엇인지 깨닫는 분별력이 생긴다는 점이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던 행동들이었지만 분별력이 생기면서 하면 안 되는 일 “what ought not to be done” (28절)이라고 여기게 된다. 관행, 문화, 규칙의 맹점(loophole)이라고 여기던 것들이 "역리"로 혹은 "부끄러운 욕심"(26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의 빛에서 다시 점검해 봐야 하는 일이 있다. 내 안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충만한가 생각해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마음과 생각이 채워져 있는가. 성령의 충만함으로 내 인생의 잔이 넘치고 있는가. 복음의 충만한 은혜에 잠겨 살고 있는가 다시 반성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