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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저희 중고등부 아이들과 성경 통독을 진행 중입니다. 창세기를 읽어 가면서 정말 다양한 질문을 듣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왜 이렇게 많은 족보가 창세기에 나오나요?”였습니다. 사실은 창세기에만 국한되지 않은 구약 (그리고 신약까지) 전체에 해당되는 질문입니다. 출애굽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구약 성경 각 권의 첫 단어를 그 책의 제목으로 사용했습니다. 창세기도 첫 단어인 “브레쉬트(처음에)"를 제목으로 합니다. 출애굽기의 첫 단어는 “브 엘레 쉐모트"인데 1장 1절 말미에 나오는 “그들의 이름은 이러하니"라는 뜻입니다. 즉, “출애굽기” 혹은 “탈출기”라는 이름은 그 책의 내용을 살려 우리의 편의를 위해 붙여진 이름에 불과합니다. 출애굽기 저작의 분명한 의도 한 가지는 이 책이 창세기와 나란히 읽히는 것이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성취로 탄생한 민족이며, 하나님은 끝까지 그 민족과 맺으신 언약에 충실하실 것이라는 사실이 출애굽기 전반에 흐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구약 성경은 꽤 오랜 기간 구전으로 존재하다가 나중에 바벨론 포로기에 가서 책이 됩니다. 구전으로 잘만 보존되던 것을 왜 갑자기 책으로 기록하게 되었을까요? 바로 포로기에 유대 민족이 처했던 문화적 변혁과 상실 또 전통의 단절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성경을 외워서 전달해 왔는데, 바벨론에서 태어나고 자란 포로기 2세 3세의 아이들은 히브리어를 말하는 것조차 어려워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살면서 2세 자녀들을 키우는 많은 이민 가정에서 격하게 공감할만한 내용입니다. 이런 이유로 “구전되던 말씀”이 “기록된 말씀”이 됩니다. 으뜸가는 관심사는 성경의 내용을 철저히 보존하는 것이었지만, 그에 버금가는 관심사가 있었으니 “문화 보존" 혹은 “전통 계승"이었습니다.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누구신지, 우리를 향해 그분이 품으신 뜻은 무엇인지, 반드시 가르치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족보들을 강조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신약 기자들도 비슷한 관심사를 공유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공동체는 분명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신약의 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히 유대 문화 및 전통의 빛 안에서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족보는 바로 그들의 관심사를 엿볼 수 있는 도구입니다. 어떻게든 예수님을 다윗 왕조의 연장 선상에서 보고자 했던, 또 메시야 언약의 성취라는 틀 안에서 예수님을 보고자 했던 시도가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마태는 우리 또한 예수님을 그런 분으로 보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전무후무한 계시를 받은 선지자가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셨고 다윗 왕조를 통해 청사진을 보여주셨던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시기 위해, 또 우리를 그 나라의 백성 삼겠다고 하신 약속을 재확인하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점은 11절의 여고냐 왕을 유다의 마지막 왕으로 서술하고 있는 점입니다. 역사상 마지막 왕은 시드기야였지만, 1차 포로 귀환대를 이끌고 바벨론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했던 스룹바벨(여고냐 왕의 손자, 12절)과 포로기 이전 다윗 왕조를 연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시드기야를 누락시킨 것으로 보입니다(혹은 14대를 맞추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습니다). 스룹바벨은 첫 바벨론 이주로부터 대략 40-50년 이후의 사람이었고 바벨론 이주 3세입니다. 유다 왕손으로 바벨론에서 누렸던 안정된 자리를 포기하고 다시 황무지 같은 유대로, 또 5만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돌아온 인물이었지요. 사도 마태도 우리에게 넌지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너희에게 주신 삶에 절대로 안주하지 말고, 현재의 세상에 너무 동화되어 살지 말고, 우리가 돌아가야 할 본향 집을 항상 바라보면서 살라… 하나님은 우리의 그러한 믿음을 기뻐하신다!


다시 시작하는 새해에 마태복음을 묵상하게 되어 참 좋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저도 새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너무나 편안해진 세상을 조금 내려놓고 본향을 그리며 오늘도 순례를 계속하려 합니다.

Updated: Nov 1, 2020

짧게 써 놓았던 것들을 모아 놓았습니다.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1. 로마서 1:1-7, "부르심"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부르심"이다. 1절,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사도 apostolos 라는 그리스어 단어도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부르심과 연관되어 있다. 바울은 또한 예수님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분으로 묘사한다. 4절, “성결의 영으로는 …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NIV 는 appoint 라는 단어를 쓰는데, 파송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으니, 결국 부르심이다.


부르심에 대한 이같은 논의는 이제 편지를 받는 이들에게로 확장된다. '이 편지를 쓰는 나 사도바울도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심을 받은 (선포되신) 분이시고, 편지를 읽고 있는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6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절에 계속된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즉 성도를 향하신 (이 편지를 읽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은 두 가지이다. 1) 예수 그리스도의 것, 2) 그분의 성도 (his holy people). 앞으로 이 책에서 밝혀지겠지만, 나의 어떠함 때문에 혹은 내가 무슨 대단한 일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불러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주권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우리 앞에 놓여진 도전이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도전이다. 내 현재 모습과 상관없이, 내 삶에 벌어지고 있는 어떤 일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부르시는 것을 믿는 것. 그리고 그렇게 사는 도전이다. 나는 예수님의 것입니다. 나는 그 분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2. 로마서 1:8-17, "피차 받는 위로"


윈-윈이라는 말("win-win strategy")은 미국의 국가 안보 전략에서 유래했다. 미국이 전쟁 상황에서 당면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태평양과 대서양, 두 대양 너머 양쪽에 적을 두는 일이다. 한 쪽에서 이기더라도 다른 한 쪽에서 진다면, 결국은 안보는 위태로워진다. 그러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양쪽 전선에서 대적을 상대하더라도 이길 수 있도록, 압도적인 군사력을 준비하고자 하는 것이 윈-윈전략이다. 지금은 그 의미가 확대되어 상생을 뜻하는 말로 널리 쓰이고 있다. 이해당사자 한쪽이라도 손해를 보게 된다면 둘 다 지는 것이라 생각하는 태도, 즉 서로 다른 주체이지만 한 운명 공동체임을 인정하는 표현이다.


본문에서 바울은 로마 교인과 그의 관계를 철저히 호혜적 윈윈 관계로 정의한다.

1) 먼저 로마 교회 교인들이 바울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

  • 11절, "...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 13절, "...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 15절,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이어지는 16-17절에 바울이 믿는 복음에 대해 나온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 즉,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사를 로마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을 굳건하게 하고 열매 맺는 신앙인이 되게 하고자 한다.

2) 이 관계성을 통해 바울 자신도 복을 받을 것이다.

  • 12절, "이는 곧 ...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 8절에 바울은 로마 교우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으로 인하여 감사한다. 바울의 로마 방문을 통해 복음의 전파가 가속화 될 것이고, 이는 바울에게 더욱 넘치는 감사를 안겨줄 것이다.

3) 이것이 끝이 아니다.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신다.

  • 16절, "...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즉,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하나님의 능력과 의를 드러내고 높이는 일이다.

성도간에 맺어진 모든 관계는 결국 윈-윈-윈 이어야 한다. 나도 좋고, 남도 좋고, 하나님께도 기쁨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교회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 동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 하지만 둘 다 신앙생활에서는 멀어졌다. 윈-윈-루즈 인 셈이다. 미국의 안보 전략을 다시 생각해 보라. 한 곳에서라도 진다면 결국 우리 모두 지게 된다.


이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평신도 지도자로 섬기던 이들의 간증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맡겨진 사역에 대해 부담스러워 하고 있었고 힘겨워 하고 있었다. 교육과 훈련의 기회가 늘 부족하다고 느꼈고, 이는 자연히 자신에 대한 낮은 영적 자존감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동의하는 것이 두 가지 더 있었다. 하나는, 자기가 맡은 영혼들이 바뀌고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의 마음에 늘 새로운 소망이 생겨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가장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어 부족한 중에도 새해마다 다시 리더로 사명자로 결신하게 한다고 했다. 둘째는, 헌신하면서 자신의 신앙이 성장했다는 사실이었다. 예수님께서 우리 삶에 이루신 가장 아름다운 윈-윈-윈의 예들이었다.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바울은 확신에 차 있다. '우리가 함께 신앙을 나누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은 나와 여러분 모두에게 승리입니다. 또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께도 승리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창세기 12:3). 모든 이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는 그 복을 전하는 청지기들로 부름받았다.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 가운데 하나님의 복이 부어지기를!



3. 로마서 1:18-25, "죄의 본질: 교환"


18절에서부터 죄의 결과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는데, 한 마디로 표현하면 교환(exchange)이다. 23절이 말씀하는대로, 영원한(immortal) 하나님의 영광을 스러지는(mortal) 우상으로 바꾼 것이 첫째, 25절이 지적하는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꾼" 것이 둘째다.


비유하자면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은 바가지를 쓰면서 살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특별한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보배의 가치를 모른 채 보석을 엿바꿔 먹은 셈이다. 교환이 일어났는데 가치가 비슷한 두 물건이 오고 간 게 아니라 완전히 사기를 당한 것이다.


24절에 가장 뼈 아픈 교환이 나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NIV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정욕에 내어 주셨다(gave over)고 말씀한다. 원래 하나님의 소유여야 하는 우리를 본능의 노예로 살아가게 내버려 두셨단다. 말하자면 소유주가 바뀐 셈인데, 인간은 참 주인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몸의 욕망을 주인삼아 종노릇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왜 세상에 오셨어야만 했는가. 거꾸로 뒤집힌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기 위해 오셨다. 더 이상 "내 버려둘" 수 없어서, 더는 지켜볼 수 없어서, 하나님 그 분의 것인 우리들을 되찾기 위해 오셨다. 그리고는 우리가 하나님 대신 택한 싸구려들을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다시 보배같은 은혜를 되돌려 주셨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와 "엿바꿔 먹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받은 물질과 시간 건강을 내어드려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을 버리고 허망한 것들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물에 분명히 보이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20절)을 보는 눈을 주시길 기도한다.



4. 로마서 1:26-32,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악은 선의 결핍이다"라고 했던 성 어거스틴의 말이 생각난다. 사실 영적 진공상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이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상태는 없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28절), 인간의 마음은 타락한 생각, "a depraved mind"으로 가득차게 되고 이는 합당하지 않은 행동으로 자연히 이어지게 된다.


15년 전 교회 수동 봉고차로 운전 연습을 하던 것이 생각난다. 어떻게 어떻게 면허는 땄지만 언덕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나였다. 그래서 새벽에 일찍 일어나 교회 봉고차를 (거의 훔쳐서) 경사가 심하고 차량통행이 뜸한 곳에서 혼자서 연습을 했던 기억이 있다. 평지에서는 가속페달이나 브레이크를 밟지 않아도 차가 정지해 있지만 언덕에서는 다르다. 앞으로 올라 가든지 뒤로 굴러 떨어지든지 두 가지 밖에는 없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본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인간은 악을 행할 수밖에 없다고 선언한다.


말씀이 주시는 소망이 있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the knowledge of God)이 회복되면 우리에게 죄가 무엇인지 깨닫는 분별력이 생긴다는 점이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던 행동들이었지만 분별력이 생기면서 하면 안 되는 일 “what ought not to be done” (28절)이라고 여기게 된다. 관행, 문화, 규칙의 맹점(loophole)이라고 여기던 것들이 "역리"로 혹은 "부끄러운 욕심"(26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의 빛에서 다시 점검해 봐야 하는 일이 있다. 내 안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충만한가 생각해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마음과 생각이 채워져 있는가. 성령의 충만함으로 내 인생의 잔이 넘치고 있는가. 복음의 충만한 은혜에 잠겨 살고 있는가 다시 반성해 본다.

이렇게 끝나다니요. 허무합니다. 예레미야서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 부분은 바벨론이 종국에 당할 심판에 대해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도구로 크게 쓰임받았던 바벨론이었는데요. 쓰임받고 버림받았습니다.

"너희는 나라들 가운데에 전파하라 공포하라 깃발을 세우라. 숨김이 없이 공포하여 이르라 바벨론이 함락되고 벨이 수치를 당하며 므로닥이 부스러지며 그 신상들은 수치를 당하며 우상들은 부스러진다 하라" (예레미야 50:2).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행하기 위해 부름받은 모든 성도들이 더 깊이 생각해야 할 주제입니다. 크게 쓰임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끝까지 쓰임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100미터 달리기 선수와 마라톤 선수는 당연히 다른 마인드로 출발선에 서게 마련입니다. 단거리 선수를 영어로 스프린터라고 하는데요, 100미터 종목에 나선 선수들은 말그대로 10초동안 사정없이 전력질주 해야 합니다. 많은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결승선만 보고 뛰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마라토너들은 다릅니다.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스프린터처럼 뛰어 나가는 이들은 결국엔 지쳐서 레이스를 중도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라톤의 핵심은 이기는 것보다 마치는 일에 있습니다.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토끼와 거북이는 서로 다른 마음가짐으로 달리기 시합에 응했을 것입니다. 토끼는 이기려고 했고, 거북이는 단지 그 경주를 마치겠다는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애초에 거북이가 토끼와 달리기 시합을 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이기기 위해 달렸던 토끼는 자기 승리가 확실시 되자 마음이 풀어졌습니다. 하지만 거북이는 애초에 자신을 이기기 위해 경주에 나선 것이었기 때문에 토끼가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고 계속 달렸습니다(기었습니다).


크게 쓰임받았지만 버림받은 바벨론을 보면서 성도들이 당한 믿음의 경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봅니다. 잠깐의 성과에 도취될 것도 없고, 몇 번의 실수나 실패에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묵묵히 뛰겠다는 마음, 꾸준히 걷겠다는 마음이면 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겼던 주인은 종들의 유능함이나 성과에 대해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착하고 충성된(good and faithful)"그들의 성품을 높이 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맡은 우리에게 찾으시는 것은 충성됨입니다(고전 4:2). 내게 주어진 상황과 관계없이 신실하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구하는 일. 묵묵히 그 분과 내 주변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면 됩니다. 하늘의 가장 큰 상급은 여기에 약속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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