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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riter: 황선웅 (Isaac)
    황선웅 (Isaac)
  • Oct 21, 2020
  • 2 min read

Updated: Oct 22, 2020

이렇게 끝나다니요. 허무합니다. 예레미야서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 부분은 바벨론이 종국에 당할 심판에 대해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도구로 크게 쓰임받았던 바벨론이었는데요. 쓰임받고 버림받았습니다.

"너희는 나라들 가운데에 전파하라 공포하라 깃발을 세우라. 숨김이 없이 공포하여 이르라 바벨론이 함락되고 벨이 수치를 당하며 므로닥이 부스러지며 그 신상들은 수치를 당하며 우상들은 부스러진다 하라" (예레미야 50:2).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행하기 위해 부름받은 모든 성도들이 더 깊이 생각해야 할 주제입니다. 크게 쓰임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끝까지 쓰임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100미터 달리기 선수와 마라톤 선수는 당연히 다른 마인드로 출발선에 서게 마련입니다. 단거리 선수를 영어로 스프린터라고 하는데요, 100미터 종목에 나선 선수들은 말그대로 10초동안 사정없이 전력질주 해야 합니다. 많은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결승선만 보고 뛰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마라토너들은 다릅니다.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스프린터처럼 뛰어 나가는 이들은 결국엔 지쳐서 레이스를 중도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라톤의 핵심은 이기는 것보다 마치는 일에 있습니다.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토끼와 거북이는 서로 다른 마음가짐으로 달리기 시합에 응했을 것입니다. 토끼는 이기려고 했고, 거북이는 단지 그 경주를 마치겠다는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애초에 거북이가 토끼와 달리기 시합을 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이기기 위해 달렸던 토끼는 자기 승리가 확실시 되자 마음이 풀어졌습니다. 하지만 거북이는 애초에 자신을 이기기 위해 경주에 나선 것이었기 때문에 토끼가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고 계속 달렸습니다(기었습니다).


크게 쓰임받았지만 버림받은 바벨론을 보면서 성도들이 당한 믿음의 경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봅니다. 잠깐의 성과에 도취될 것도 없고, 몇 번의 실수나 실패에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묵묵히 뛰겠다는 마음, 꾸준히 걷겠다는 마음이면 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겼던 주인은 종들의 유능함이나 성과에 대해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착하고 충성된(good and faithful)"그들의 성품을 높이 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맡은 우리에게 찾으시는 것은 충성됨입니다(고전 4:2). 내게 주어진 상황과 관계없이 신실하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구하는 일. 묵묵히 그 분과 내 주변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면 됩니다. 하늘의 가장 큰 상급은 여기에 약속되어 있습니다.

  • Writer: 황선웅 (Isaac)
    황선웅 (Isaac)
  • Jun 22, 2020
  • 2 min read

Youth(중고등부)를 맡아 사역한지 3년째 되던 여름이었다. 교회 밴을 운전하고 가던 중에 학생 한 명이 물었었다. “Do you like being a pastor?” 목회하는 것이 좋은가요? 라는 간단한 질문이었지만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런 대답을 했던 기억이 난다. “힘들때도 있지만, 다양한 경험을 해 볼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목회자는 운전기사도 될 수 있고, 연설가, 작가, 교사, 행정가, 수리공, 가수, 사진가 역할도 겸하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상담가, 작명가, 청소부, 웹사이트 관리자, 행사 연출/진행, 보육교사, 건물 관리인, 이야기 꾼 등의 역할도 한다. 그야말로 종합 엔터테이너 역할에다 행정력도 발휘해야 하고, 본질적 기능이라 할 수 있는 영적인 기능도 수행해야 한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올해는 온라인 여름성경학교를 진행하기로 했다. 저런 옷을 아마존에서 사 입고, 기상 캐스터들이나 서는 크로마키 화면 앞에서 저런 비디오를 찍었다. 안 그래도 역할이 많은데 유튜버 역할도 목회자의 기능에 들어가는 시대가 된 셈이다 (이런 변화는 분명 어느 시점에 이미 시작되어 있었고, 코로나 사태를 이를 가속화했을 뿐이다).


모세오경을 다시 읽으면서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의 역할을 눈 여겨 보게 되었다. 그들의 본질적 기능은 성전에서 봉사하고 예배를 돕는 일이었다. 레위기가 말씀하는 여러 제의의 수행이라든지, 민수기가 말씀하는 성막의 이동과 관련된 그들의 역할이라든지, 제사장 신분을 가진 이들이 수행하는 본질적 영역에 해당하는 종교적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역할은 종교적 역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부정한 피부병에 대해 다루는 레위기 13장은 제사장을 마치 공중보건의처럼 취급한다. 각종 피부병의 진찰, 진단, 처방, 및 후속절차까지 모두 제사장이 담당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레위기 27장은 제사장이 서원예물의 값을 매기도록 규정한다. 세상에나. 감정사(appraiser)의 역할이다. 제사장이 값을 매겨야 하는 것들은 사람에서부터, 가축, 집, 토지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했다. 그런가하면 신명기 17장은 까다로운 소송 사건들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가도록 규정한다. 지역에서 판별하기 어려운 것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과 재판관들에게 보내라고 말씀하신다.


영적인 기능은 목회의 본질이지만, 그 한 가지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처럼 들린다. 물론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과 올바른 예배를 통해 성도들을 하나님의 임재의 장에 세우는 것이 목회자의 주된 임무임에는 틀림 없지만, 영/혼/육이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사람들의 영/혼/육과 관련된 제반의 일에 관심을 갖고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말씀이리라. 시사에도 밝아야 하고, 경제, 정치, 문화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상황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분별하는 일, 그리고 그것을 나누는 일 또한 목회자의 임무라는 생각이 든다.


10년이나 20년 뒤에 2020 Virtual VBS Promo 영상을 다시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게될까. “흑역사"라고 생각하면서 부끄러워 할까. 아닐 것 같다. ‘2020년에는 저런 것을 하면서 재미나게 목회했었구나. 감사하다.’ 생각할 것 같다. 지금 양떼들이 당하는 고통을 이해하고, 그에 맞는 맞춤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내게 주신 소명이라는 것을 다시 되새길 것 같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더욱 감사한 오늘이다.

  • Writer: 황선웅 (Isaac)
    황선웅 (Isaac)
  • May 29, 2020
  • 3 min read

갈수록 글쓰는 일이 어렵게 느껴집니다. 다른 분들의 글을 보면서 눈은 높아졌는데 제 글은 수준미달인 탓입니다. 초연결 시대가 되면서, 제가 남긴 흔적들이 인터넷 어딘가에 영원히 남는다는 사실도 제 의지를 꺾는 요인입니다. 또 글이 부족한 탓에 제가 의도했던 것과 달리 전달되거나 해석될 때 견디기 힘든 점도 있습니다. 그래도 더 쓰려 합니다. 실수하면서 성장하고, 부족함이 드러나는만큼 더 큰 은혜를 체험하는 글쓰기가 되길 소망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가 당한 고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다고 말씀합니다 (고후 11:24). “사십에 하나 감한 매”라는 법적 관습은 신명기 25장에서 유래했습니다. 25장 1-3절은 현재 법률 용어로 말하면 과잉 처벌 금지에 관한 조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3절은 사실 사십대까지 때리는 것을 용인했다는 부분인데요. 법을 집행하면서 행여나 있을 실수에 대비해서 사십에 하나 감한 삼십구대를 태형의 최고형으로 시행했던 것 같습니다.


사형제를 여전히 시행하는 나라들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사형제도 자체는 존속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시행되지 않는 나라입니다. 마지막 사형 집행이 1997년 12월이었고 현재 “실질적 사형제 폐지국"으로 분류된다고 하네요 [1]. 사형을 시행하는 나라들조차도 보다 인도적인 사형 방법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사형수가 느끼는 고통을 최소화하면서, 최대한 짧은 시간에 죽음에 이르게 하고, 신체에 남는 상처 등을 최소화하려 노력합니다. 약물 투약같은 것이 듣기에는 잔인해도 생각보다 괜찮은 형 집행 방법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상처라곤 주사 자국 하나만 남고, 약간의 마취 후 고통 없이 보내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극심한 고통을 가하는 전기 의자나, 몸에 상처를 남기는 총살이나 교수형보다 약물에 의한 사형이 더 “인도주의적"인 방법이라는 얘기입니다.


신명기 본문이 말씀하는 사십대까지 용인하는 태형도 마찬가지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비인도주의적이고 잔인한 것 같아도, 본 율법이 지향하는 바는 형량의 한계를 정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본다면 인도주의적 제도인 셈입니다. 3절 후반부는 이를 방증합니다. “... 만일 [사십대를]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 범죄자가 태형에 합당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가 여전히 네 형제인 것을 기억해야 하며, 그가 저지른 범죄의 흉악한 정도가 인간으로서 그가 지닌 존엄성을 잊게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일견 현대의 독자들을 당황시킵니다. 형이 자식 없이 죽어서 형수가 과부가 되면, “형제 된 의무를 다 행해야"한다고 말씀하는데, 이는 형수와 잠자리를 가지라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8장의 다말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유다의 장자 엘은 다말과 결혼한 뒤 자식없이 죽습니다. 둘째 아들 오난은 형수와 합방은 하지만 형제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땅에 설정합니다. 쾌락은 취하고 의무는 져버린 이 행위를 성경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했다"고 말씀합니다(창 38:10). 결국 오난도 죽고, 다말은 자구책을 마련해서 시아버지였던 유다를 통해서 아들을 낳습니다.


계대결혼(levirate marriage)이라 불렸던 이 제도는 역사속에서 종종 관찰되던 풍습이었습니다. 고구려에도 형사취수제라고 불렸던 비슷한 풍습이 있었다고 하지요. 당시에 여성들은 토지나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갖지 못했고, 이는 과부가 된 형수가 재산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고, 보호받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또한 만일 형수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면 가문의 재산이 다른 집으로 넘어가게 되거나, 소유권이 명백하게 규정되지 않고 붕 뜨게 되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계대결혼 제도는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는 아들이 없는 미망인을 보호하면서 그 집안의 재산권을 보호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현대 문화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형제 된 의무"의 배경은 바로 보호였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는 이런 점에서 정말 은혜롭습니다. 남편도 잃고 아들도 없이 보호받지 못하는 신세에서 시아버지와 동침함으로 인생역전한 다말이라는 여인이 등장하고(일종의 계대결혼), 또 계대결혼을 통해 자기 인생도 바꾸고 가문도 살린 룻이라는 모압 여인도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율법이 꿈꿨던 약자에 대한 관심과 보호가 성육신이라는 사건을 통해 재조명 된 것이지요. 보호를 받아야 하는 약자가 하나님의 역사에 당당히 동참하고 쓰임받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고후 3:6). 로마서 2장에도 말씀합니다. “오직 [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니라 ...” 율법이 쓸 데 없다거나 폐기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조문에 매이지 말고 오히려 그 안에 담긴 정신을 보고 계승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우리는 조문을 뛰어넘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으로 새 사람이 된 우리는 그러므로 새 언약의 일꾼입니다. 낡은 언약에 매이지 않고, 오히려 그 정신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살리는 사람들입니다.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고 품는 사람들입니다.

[1] "대한민국의 사형제"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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