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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riter: 황선웅 (Isaac)
    황선웅 (Isaac)
  • Aug 16, 2018
  • 2 min read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얻은 바울은 하나님이 그에게 어떻게 나타나셨는지에 (theophany) 관해 이야기 한다. 자연스레 출애굽기 3장이 떠오른다. 모세도 바울과 같은 질문을 했다.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 [하나님] 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출애굽기 3:13).

완곡하게 했지만, 정작 묻는 것은, “뉘십니까?” 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I am who I am.” 시쳇말로 하면, “안얄랴줌”이다. “나는 나야 임마. 내 이름에 관해서 너는 알 필요도 없고, 나는 이름같은 것 있지도 않다.”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모세의 질문에 인간의 모든 종교적 시도가 담겨 있다고 하면 무리일까. 너머에 계신 그 분을 어떻게든 한 개념안에 담아보려고 했던 것이 종교이기 때문이다. 잡을 수 없는 그 분을 어떻게든 한 이름안에 잡아 넣어 보려 했던 것이 종교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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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 https://b2theophany.wordpress.com/examples/

그러나 사도행전 26장의 “그 분”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맙소사. 신적 존재가 친절하게 자기 소개를 한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이해하기 쉬운 모습으로 오셨다. 우리 모두가 만질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분으로 오셨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가장 연약한 인간을 통해서도 완전히 증거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신적 현상, 즉 모세가 만났던 하나님과 정반대의 캐릭터이다.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나사렛이라는 촌동네 목수의 아들로 자랐다. 세리와 매춘부같은 사회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과 어울렸고, 당대 지도자들의 모든 미움을 한 몸에 샀다. 끝은 어땠는가. 로마 제국의 반동 분자로 몰려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처형되었다. 출애굽기 3장의 신적 존재가 잡히지 않는 초월 (transcendence) 의 하나님이라면, 사도행전 26장의 예수님은, 누구나 잡을 수 있고 이해 가능한 (grasp, 각주 1) 존재가 되기로 선택하신 내재 (Immanence) 의 하나님이었다. 예수께서 잡혀 죽으신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나는 네가 괴롭히는 (박해하는) 그 예수”라고 소개하지 않으셨는가.


잡히신 예수님 덕분에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길이 열렸다. 바울에게 괴롭힘 당하던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다. 18절 이하의 바울의 사명 단락이 새롭게 읽힌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바울의 사명이다. 열방이 빛으로 나아올 수 있는 이유는, 빛이 먼저 어둠에 가운데 비쳤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이유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로 가는 정확한 길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의 참된 사명은 그가 열방에게 잡힐 때, 열방 중에 가장 연약한 자로 판명될 때 가장 확실하게 성취될 수 있다. 힘 없이 재판을 받고 압송되어 가는 바울을 통해 사람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1) Grasp 은 1차적 의미로는 붙잡다의 의미를 가진다. 파생적으로 완전히 이해하다 (마스터하다) 라는 단어를 갖는다.

Updated: Nov 20, 2019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어떤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에베소 장로들을 청해 마지막 당부의 말을 남길 때에도 바울은 그들을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었다. 성령께서는 21장에서도 두 번이나 다시 확증을 주신다 (4절, 10-11절). 하나님의 계획은 확정적이다.


말씀을 통해 주시는 첫번째 깨달음은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계획을 사랑하시는 이들에게 미리 알려주신다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기대하는 좋은 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미리 알리신다.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에는 가감이 없다. “...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22:2). ‘일단 그 산에서 이삭과 함께 만나자, 그 다음은 나중에 알려줄게’라고 하지 않으시고, “네 아들을 거기서 번제로 바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도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미리 알고 계셨다. 그래서 괴로움 가운데 이 잔이 지나가기를 기도하기도 하셨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시라” (요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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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 yogalousiana

두번째, 하나님의 뜻이 분명할 때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전적 순종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결정을 내리셨다. 바울에게 여러 형태로 알려주기까지 하지 않으셨는가. 결정은 끝났다. 이제는 실행만 남은 셈이다. 실행의 단계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왜”라고 묻는 것이 아니다. 다른 좋은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아니다. 순종하는 것, 속된 말로 “까라면 까는 것”이다. 이는 14절의 제자들의 기도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는 사실 기도자의 의지를 담는 기도이다. “이제 주님의 뜻을 정확히 알았습니다. 우리가 가서 그 뜻을 위해 살겠습니다. 우리를 통해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기도자들이 가진, 실행에 관한 강력한 의지가 이 기도에 들어 있다. 그래서 이 기도는 결코 가볍지 않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 가르쳐 주셨다. 우리는 하늘의 뜻을 이 땅 가운데 이루는 천국의 야전 수색대원들이다.

  • Writer: 황선웅 (Isaac)
    황선웅 (Isaac)
  • May 17, 2018
  • 1 min read

Updated: Nov 20, 2019

1. 우선 이 농부는 이상한 사람이다. 아까운 씨앗을 돌밭에도 뿌리고 가시 덤불에도 뿌리고, 세상에 길가에도 뿌린다. 농부는 굶어 죽어도 종자를 베고 죽는다고 했다. 좋은 밭을 구입하고, 땅을 갈고, 잘 준비를 하고 뿌려도 시원찮을 판에, 이 농부는 그 아까운 씨앗을 아무데나 마구 뿌린다.


우리 마음에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이 바로 이 농부와 같다. 재리에 대한 유혹이 가득차 있을 때에도, 걱정과 근심이 많아 말씀이 파고들 틈이 없는 그 때에도, 하나님은 부지런히 우리 마음에 말씀의 씨앗을 뿌리신다. 우리 마음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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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밭은 대단히 수동적인 이미지이다. 우리가 만약 밭이라면, 내가 자갈밭이 될지 좋은밭이 될지 선택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질 때에 나를 바꿔서 열매맺는 밭이 되게 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우리는 스스로를 바꿀 수 있는 깨달음도 능력도 없다.


그래서 이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13:10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비유를 풀어달라고 요청한 부분이다. 제자이건 무리들이건 아무도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 했다. 오직 주님께 나아오는 자만이 비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즉 우리의 마음을 좋은 밭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참 농부이신 주님께 겸손히 나아오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적용해 보면, 우리 삶 속에 어떤 밭이 될 수 있을지 고를 수 있는 순간들이 있다. 이주를 해야 하거나, 대학교에 진학하거나, 어떤 사람들과 친해질지 결정할 때 등이다. 이러한 선택의 상황에서 우리가 쉽게 놓치거나 경히 여기는 부분이 있는데, 나를 신앙적으로 성장하게 해 줄 수 있는 환경인가를 보는 것이다. 이곳으로 이사를 가면, 혹은 이 학교에 진학을 하면, 이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면, 내가 영적으로 더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 반드시 우리 결정 과정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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