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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riter: 황선웅 (Isaac)
    황선웅 (Isaac)
  • May 9, 2018
  • 1 min read

Updated: Nov 20, 2019

주님께서 성찬을 제정하시던 밤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언약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피가 이 계약의 보증금인 셈이다. 많은 경우 계약을 성사시키는 것은 그 사람의 신용이라기 보다는 보증금이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당사자인 우리들은 신용 불량자였다. 신용 불량자였던 을들과 새 언약을 맺기 위해 갑인 하나님이 친히 피를 흘렸다는 얘기다.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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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 Gospel Coalition

따라서 이 계약의 유효성은 을의 계약 이행 여부에 달려있지 않다. 오히려 갑의 신용과 관련이 있다. 갑에게는 이 계약을 계속 유지할 지속적 의지가 있는가? 그렇다. 그가 흘린 피가 그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명이다. 이제 을이 해야 하는 무엇인가? 갑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런 은혜를 베푼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하고, 새로이 주어진 삶을 갑이 원하는 방법으로 사는 것이다.

  • Writer: 황선웅 (Isaac)
    황선웅 (Isaac)
  • May 1, 2018
  • 1 min read

Updated: Nov 20, 2019

본문 안에 긍휼히 여긴다는 말이 3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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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어로는 Compassion 인데, Com- (함께) 이라는 단어와 pati (고통을 당하다) 라는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The Passion of Christ 라는 영화 제목에서도 보듯이 passion 은 열정이라는 뜻으로 더 널리 쓰이지만, 고난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Compassion (긍휼) 이라는 단어는 함께 고난을 당하다, to suffer with 라는 뜻이다.


2) 히브리어로는 라캄이라는 동사가 사용되었다. 이 단어의 어근은 레켐이라는 단어로 자궁을 뜻하는 말이다. 우리가 잘 아는 호세아의 딸의 이름인 로루하마도 부정어인 로와 루카마 (라캄) 이 합쳐져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다"라는 뜻이다. 예레미야 31:20 절 말씀도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라캄)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 내친 김에 한문도 찾아보았는데, 긍휼이란 단어에서 "긍"자는 자랑스러워하다는 뜻이다. 긍지, 자긍심 같은 단어에서 볼 수 있다. 다만 같은 한자가 "관"이라고 읽힐 때가 있는데, 이 때는 앓다라는 뜻이다. "휼"자도 심방변을 포함하여 마음에 일어나는 어떤 감정임을 밝혀준다.


이 세 단어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것이 고통이라고 말하면 너무한 주장일까.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은 포로기에 있는 이스라엘을 향해 품으신 그저 불쌍한 마음 (옛다 구원받아라) 이런 마음이 아니다. 그 마음 이면에는, 아들을 버려야 했던 아버지가 있다. 이 본문이 고난받는 메시야에 관한 53장 바로 다음에 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 너머에는 우리의 연약함과 아픔을 속속들이 이해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눈물이 있다.

Updated: Nov 20, 2019

욥기 3:11-26, "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이 입을 열어 이르되,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

자기의 생일을 저주한 욥은 죽음을 동경합니다.아예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태어났더라도 사고가 있어서 고통을 모른채 일찍 갔더라면, 차라리 그게 나았을 것 같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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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언제나 가 보지 못한 길을 동경하는 것 같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이 택한 길 혹은주어진 길과, 자신이 선택하지 못한 기회비용, 혹은 혹시라도 가능했을 새로운 길들을 비교하며, 언제나 동경합니다.


욥의 상태가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삶 자체에 대한 기회비용 즉 죽음을 동경합니다. '과연 죽음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해 보면서도,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여러가지 묵상의 고리들을 남겨두고 제 눈은 20절에 멈추어 섰습니다. NRSV (영역 개역 개정판) 에는 20절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Why is light given to one in misery, and life to the bitter in soul?" 직역하면, "왜 빛은 절망에 싸인 채 주어지는가? 왜 생명은 영혼의 고뇌에 차 있는 이들에게 주어지는가?"


인생에 대한 정말 절묘한 삶에 비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생명이 있지만 고뇌가 가득할 뿐이고, 빛은 있는 것 같지만, 절망에 잠겨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받아들이기 나름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절망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빛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영혼의 고뇌속에서 생명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도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절망이 가득한 세상 속에 한 줄기 소망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고뇌가 가득한 인생 가운데 충만한 생명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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