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 Writer: 황선웅 (Isaac)
    황선웅 (Isaac)
  • Apr 10, 2018
  • 1 min read

기독교는 태생부터 도시의 종교였다. 다윗은 시온산성을 빼앗아 다윗성이라고 부르며 수도를 삼았다 (삼하 5:6-8). 복음서는 예수님이 갈릴리 시골에서부터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여정을 그리며, 바울이 교회를 세운 곳들은 모두 그 당시의 중심 도시들이었다.


도시안에 존재하면서, 기독교는 기성권력구조 (establishment of power) 에 저항하기도 하였고 그것과 결탁하기도 하였다. 미국 복음주의자들이 트럼프를 일방적으로 지지한 것이 결탁의 예라면, 신사참배를 목숨을 걸고 거부한 고신 장로교인들과, 중세의 수도원 운동은 저항에 해당한다.


기독교인들의 독특한 삶의 자리는 이 갈등안에서 발견된다. 우리는 도시에서 모였지만, 변방으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 곳은 도시이지만, 그 하나님은 우리를 힘의 중심이 아니라 가장 자리와 그 밖으로 나가도록 도전하신다.


아모스를 위시한 선지자들이 선포한다. 매력적인 바알이나 아세라를 버리고, 별 인기가 없는 야훼라는 하나님께 돌아가라는 것이다. 선지서들은, 풍요로 가득한 가나안 땅에서부터, 가파른 시내산으로 또 척박한 광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낸다. 성령을 받은 초대 교회는, 공용어인 헬라어가 아니라, 각 지방의 말로 방언 말하기를 시작한다. 도시에 사는 교인들이지만, 지방으로 가라하시는 명령이다.


이제는 잠시 신문을 내려놓고, 성경으로 돌아갈 때다. 말씀으로 돌아가서, 말씀안의 하나님이 초대하는 곳으로 우리의 눈을 들때다. 소외된 자들, 약자들을 향해서, 복음이 필요한 변방을 향해서 우리의 발걸음을 옮길 때다.

민수기 12장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는 내용을 다룬다. 모세에게도 분명 잘못이 있다. 구스 여인과 결혼한 것 칭찬받을 일이 전혀 못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책망은 오롯이 미리암과 아론에게만 향한다. 미리암이 주도적 역할을 했는지, 그녀만 나병에 걸린다.


ree
미켈란젤로의 모세상 (Image Credit: Lawrence OP)

모세의 겸손한 리더십이 빛나는 부분은, 자기 형님 누님이 자기를 비판할 때에도 아무런 대꾸하지 않은 것이다. 가장 아픈 것이 사실 가족들의 비판 아니던가. 모세를 가장 헌신적으로 도와야 할 사람들로부터 가장 날 선 비판이 가해졌을 때, 모세는 반응하지 않았다. "상대방이 역류를 일으켰을 때 반응하지 않는 것은, 상대방에게 오히려 역류가 된다"는 미생의 명대사처럼 모세는 공격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성경은 모세의 침묵뿐만 아니라, 그의 온유함 (겸손함) 을 말씀한다. 그는 비판 앞에서 겸손하게 자기 실수를 인정하고 상대방의 말을 받아들인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네요." "내가 잘못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지적에 일리가 있습니다." 이 겸손함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이끌어 낸다. 모세가 아무 말도 안 할 것이라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아론과 미리암에게 잘못을 물으신다. 뒤집어 생각하면 우리가 나서서 오바하면 하나님이 개입하실 이유가 없어진다는 뜻일까.


그의 리더십은 겸손함뿐 아니라 사람들을 향한 사랑에 바탕했다. 자기 자리를 탐했던 누님이 나병에 걸렸을 때, 그는 고소해 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랑으로 가득찬 이 사람은 미리암을 위해 직접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한다 (민 12:13). 그의 마음은 미리암을 위해 기도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미리암을 7일동안 격리하라 명하셨을 때, 모세는 모든 백성이 그 자리에 서서 7일동안 미리암을 기다리도록 한다. 자기가 스스로 범한 잘못때문에 벌을 받는 한 사람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여정을 멈추도록 한 것이다. 비록 큰 실수를 범하고 벌 받는 기간중에 있지만, 미리암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확실한 신호를 그녀에게 보내는 것이다. 자기의 권위에 도전했던 미리암조차 용서하고 품는 모세를 보면서, 또 7일동안 멈춰선 이스라엘을 보면서, 백성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범하는 실수를 덮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는 생각을, 그리고 내 죄악됨과 상관없이 여전히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놀랍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결국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모세의 리더십보다 더 큰 것으로 우리의 눈을 돌리게 한다.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나님은 그 백성의 겸손한 마음을 반드시 기억하시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정의와 능력이 드러나게 하신다. 우리의 연약함과 죄악은 절대로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안에 있는 그분의 택하신 백성이다.


ree

(Image credit: http://drewbmcintyre.com/2013/12/22/n-t-wright-trivialized-discourse-and-the-need-for-a-third-way/)


이사야 7:1-9 본문에서, 아하스 왕은 두 가지 선택지의 오류에 빠져있다. 두 가지 경우에서 선택해야 하는 경우, 그 둘 중에 하나는 무조건 옳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이다. 둘 중에 하나는 무조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착각하는 것. (짜장면과 짬뽕 중에 고민을 너무 한 나머지 탕수육은 고려조차 못 해 본 경험이 다들 있으리라!) 그러나 하나님께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상상조차 못하는 새로운 길이 있다. 가장 좋은 길, 가장 선한 길이다.


북이스라엘/아람 연합군에 포위된 아하스에게는, 1) 피터지게 싸우다 죽거나, 2) 아니면 그들의 반 앗시리아 동맹에 가담하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이외에는 사실 생각할 수 있는 옵션이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1번도 위험하고, 2번도 결국에는 파멸로 이끌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1번에는 자기보다 힘이 센 두 나라와 싸워야 하는 위험성이, 2번 선택에는, 지금 당장은 살 수 있을지 몰라도, 대국 앗시리아가 큰 군대를 이끌고 서진할때, 반란군으로 찍혀서 완전히 망하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제삼의 대안을 주신다. 바로 “가만히 있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선택할까 고민하지 말고,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선택"을 하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 길이 가장 좋은 길이었다. 마치 홍해앞의 이스라엘이 추격해 오는 애굽 군대에 투항하느냐 아니면 그들과 싸우느냐 고민할 때, 하나님께서 “가만히 있으라” 그리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행하는 구원을 보라" 말씀하신 것과 같다. 제삼의 길, 그리고 가장 좋은 옵션이었다.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고 애굽의 정예 군대를 수장시키셨다.


요한복음 9장에서도 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을 두고 사람들이 예수님께 묻는다. "이렇게 된 것이 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이때 주님은 두 가지 선택의 오류에 빠지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양자를 모두 부정하신 뒤에, 이렇게 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된 것이라 선언하셨다.


하나님께는 가장 좋은 길이 있다. 가장 선한길을 그분은 아신다. 오늘도 성령께서 우리 마음과 영의 눈을 열어 주셔서, 내가 고민하는 선택지들 외에 가장 좋은 길, 가장 선한 길을 우리에게 보이시고 그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All Rights Reserved. 2023.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