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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riter: 황선웅 (Isaac)
    황선웅 (Isaac)
  • Dec 29, 2021
  • 2 min read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따르면, 자연 상태의 인간은 불안과 공포의 지배 하에 삽니다. 홉스는 이런 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The war of all against all)"이라는 유명한 말로 요약했습니다. 규율도 없고 통제도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개인이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대환장 상황이 "자연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한편 인간 모두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권리가 있는데, 이를테면 자유와 같은 것입니다. 홉스는 인간이 자연 상태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자기 권리를 희생하여 사회적 계약을 통해 국가를 탄생시킨다고 보았습니다. 욥기 41장에 나오는 리워야단(리바이어던)처럼 강력한 힘을 가진 국가에 자기 권리를 이양하고 국가가 제공하는 안전을 선택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홉스는 강력한 국가, 특히 현명한 인물이 다스리는 강력한 군주제 국가를 신봉했습니다. 지혜로운 군주가 다스리는, 리워야단 같은 막강한 힘을 가진 국가를 이상적 상태로 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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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41장에 하나님께서 리워야단에 대해 길게 설명하십니다. 의도는 10절에 나옵니다. "... 아무도 [리워야단을] 격동시킬 만큼 담대하지 못하거든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

욥이 당한 상황은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욥이 제기하는 신학적 질문도 타당해 보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의인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고통을 주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런 통치가 의롭다고 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어찌 이렇게 행하실 수 있습니까?' '왜 제게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급하다고 바늘 허리에 실을 맬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욥의 상황이 안타깝고 억울하지만 그렇다고 담대하게 리워야단을 격동시킬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대항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맞지 않은 것 같아도, 그 크신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조금만 알 뿐이고 부분적으로 이해할 뿐입니다. 그래서인지 욥은 42장에 가서 자기가 앞서 제기한 질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2장 3절). NIV는 "... I spoke of ... things too wonderful for me to know(너무나 엄청난 일이라 제가 알 수도 없는 것들을 제 입에 담았습니다)"라고 풀었습니다.


팬데믹이라는 리워야단과 싸우고 있습니다. 경제 위기, 공급망의 위기, 구인난... 어디 그뿐인가요. 건강, 가정, 자녀, 생업 등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그 큰 일들 앞에 우리는 억울해 하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 상황을 통해 문제를 초월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경험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대항할 수 없는 리워야단을 애완동물처럼 다루시는 그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혹시 그래서 이런 어려움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은 아닌가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감히 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을 높여 드립니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계획을 깨트리시고 하나님의 가장 선하신 뜻을 이루시옵소서. 할렐루야!



  • Writer: 황선웅 (Isaac)
    황선웅 (Isaac)
  • Nov 17, 2021
  • 2 min read

Updated: Nov 18, 2021

맷 커츠(Matt Cutts)라는 사람의 "Try Something New for 30 Days"라는 테드 강연을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컴퓨터 엔지니어였던 맷은 이전에 전혀 해 보지 않았던 새로운 일에 도전합니다. 이를테면, 자전거 타고 출퇴근하기, 소설 집필하기, 매일 사진 한 장 찍기 등이었습니다. 삶의 지루함을 이기는 목표에 더불어 맷이 덤으로 얻은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루 하루를 더 소중하게 간직하는 일이었습니다. "... instead of the months flying by, forgotten, the time was much more memorable."



제 인생의 엉뚱한 도전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여름 방학 동안 매일 아침에 축구를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10살짜리 꼬마가 방학중인 학교에 매일 아침 9시에 나와서 축구를 했습니다. 우연히 자기만큼이나 엉뚱한 친구들을 만나서 매일 같이 공을 찼습니다. 방학이 끝나고 어머니께서 전화를 한통 받으셨는데, 아이를 육상을 시켜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으시던 육상부 선생님이셨습니다.


고 1때는 판서를 많이 하시는 기술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기술 수업에는 별 흥미가 없었는데, 워낙 공책에 필기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셔서 오른손이 저리도록 필기를 해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엉뚱한 고등학생은 그 시간을 통해 글씨 연습을 하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써야 되는 것이라면 글씨 연습이라도 하자는 생각이 들었고, 기술 선생님이 워낙 달필이셔서 선생님 같은 글씨체를 갖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1년 동안의 집중적인 글씨 연습을 통해 저만의 필체를 덤으로 갖게 되었습니다.


도전이라는 것은 늘 그렇습니다. 도전을 결정하는 것은 내 자신입니다. 도전은 주체적 결정입니다. 그러나 도전은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도전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맷이 하루 하루를 소중하게 간직하는 매개체를 갖게 된 것처럼, 그리고 제가 육상부 입단 권유를 받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설사 도전한 것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배우고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전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우리는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도전을 통해 귀중한 경험과 교훈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라고 성숙해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도전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80살 모세는 은퇴 이후의 고즈넉하고 느린 삶을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부르셔서 타이어를 갈아 끼우고(retire) 하나님의 구원 전선에 복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가 거듭, "제가요?" "저요?" "Who am I?" 라고 묻는 것이 오히려 당연해 보입니다. 여리고성을 돌던 이스라엘도 생각났습니다. 자기들끼리도 수군대며 물었을 것입니다. "What on earth are we doing?" "우리 지금 대체 뭐하고 있는 거에요?" 하지만 가나안 정복이라는 큰 도전이 이스라엘에게 분명히 남긴 교훈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신명기의 긴 설교 중 모세는 거듭해서 말합니다(命記의 잔나비 신자는 "거듭"이라는 뜻으로 풀어야 합니다).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신명기 20:1)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도전함으로 이스라엘이 직접 체득한 진리였습니다.


한국에 있는 친구나 후배들이 유학이나 이민에 관해 상담을 요청해 올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이야기합니다.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와라. 지금 불가능해 보이지만, 결혼하면 더 못 온다. 아이 생기면 그때는 꿈도 못 꾼다.” 학위를 어떻게 시작하고 마칠지에 대해 고민하는 그들에게 저는 도전합니다. “지금 당장 준비해서 와라. 과정에 들어가면 다 할 수 있게 된다.” 학위를 마치면 감사하고, 마치지 못하더라도 여기서 생존할 수 있었던 기간만큼 감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려운 이민생활 해 가면서 또 여기저기 부딪혀 가면서 만나는 하나님이 진짜 학위이고 명예이지 않겠습니까.


현재 삶에 어떤 도전을 마주하고 계십니까? 어떤 도전 앞에서 머뭇거리고 계십니까? 닻을 올리고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실패하더라도, 목적한 곳에 닿지 못 하더라도 귀중한 배움을 얻을 것입니다. 성공한다하더라도, 상상 이상의 풍성한 경험과 이야기를 갖게 될 것입니다. 불확실성을 향해서, 그리고 변화의 가능성을 향해서 노를 저어 나가십시오. 계속해서 긍정적인 자세를 갖고 새로운 내일을 향해 헤엄쳐 나가십시오. 도전!

지난 토요일에 초등부(3-5학년) 아이들과 Zoom 으로 성경공부 하면서 나눈 것입니다.


도입: 왜 성탄절에만 선물을 주고 받는가?

다른 휴일이나 명절, 예를 들면 추수감사절에는 선물을 교환하는 풍습이 없다. 오로지 크리스마스에만 서로 선물과 카드를 주고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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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최고의 선물, 예수님

왜 그런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이라는 큰 선물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에 우리를 위해 그 분께서 직접 오셨다. 이사야 9:6절은 말씀한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Wonderful)라, 모사(Counselor)라, 전능하신 하나님(Mighty God)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Everlasting Father)라, 평강의 왕(Prince of Peace)이라 할 것임이라.”


예수님을 부르는 칭호들에 우리 인간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들어있다. “정사를 메었다”는 표현도 NIV는 “the government will be upon His shoulder”라고 풀었다. 우리를 다스리실 분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통치는 단지 권력이나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위해 기묘한 일을 행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마음을 평강으로 채우시는 카운셀러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발걸음 발걸음을 인도해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오늘 왔다 없어지는 분이 아니다. 그 분의 통치는 영원하다.


이러한 하나님을 아는 특권이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주어졌다!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평화와 기쁨으로 채워 주셨다. 우리는 이 위대한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다. 서로 서로 선물을 주는 풍습은 바로 우리가 받은 최고의 선물, 예수님을 기념하고 그 분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적용: 선물에 감사하기

가장 좋은 선물이신 예수님을 이미 받은 사람들로서, 이번 성탄에는 부모님께 자신있게 말씀드려 보라고 도전했다. “엄마, 아빠, 나는 이미 예수님을 받았으니까 올해는 성탄 선물 필요 없어요. 예수님이면 충분해요.” 아이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ㅋㅋㅋ).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을 채팅창에 써 보라고 했다. 레고 (제목을 기억할 수 없는 무슨 시리즈…), 게임기, 아이패드, 옷 (물론 대범하게 돈 $50을 쓴 아이도 있었다) 을 입력하면서 다시 아이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다음은 부모님이 선물이라면서 줄 수 있는 물건이긴 하지만 최악의 선물이 될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지 생각해 보고 다시 써 보라고 했다. 책, 책, 책 (ㅋㅋㅋ), 학용품, 주로 공부와 관련된 물건들이 나왔다.


그리고 이렇게 도전했다. 예수님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이미 받았으니 선물을 받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 너무 하다고 생각한다면, 무엇을 선물로 받게 되든지 (심지어 책을 받는다 하더라도), 감사하기로 하자. 인정하기 싫지만 납득한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하고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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