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5:1-10 묵상, 법 조문이 아닌 정신을
- 황선웅 (Isaac)
- May 29, 2020
- 3 min read
갈수록 글쓰는 일이 어렵게 느껴집니다. 다른 분들의 글을 보면서 눈은 높아졌는데 제 글은 수준미달인 탓입니다. 초연결 시대가 되면서, 제가 남긴 흔적들이 인터넷 어딘가에 영원히 남는다는 사실도 제 의지를 꺾는 요인입니다. 또 글이 부족한 탓에 제가 의도했던 것과 달리 전달되거나 해석될 때 견디기 힘든 점도 있습니다. 그래도 더 쓰려 합니다. 실수하면서 성장하고, 부족함이 드러나는만큼 더 큰 은혜를 체험하는 글쓰기가 되길 소망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가 당한 고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다고 말씀합니다 (고후 11:24). “사십에 하나 감한 매”라는 법적 관습은 신명기 25장에서 유래했습니다. 25장 1-3절은 현재 법률 용어로 말하면 과잉 처벌 금지에 관한 조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3절은 사실 사십대까지 때리는 것을 용인했다는 부분인데요. 법을 집행하면서 행여나 있을 실수에 대비해서 사십에 하나 감한 삼십구대를 태형의 최고형으로 시행했던 것 같습니다.
사형제를 여전히 시행하는 나라들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사형제도 자체는 존속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시행되지 않는 나라입니다. 마지막 사형 집행이 1997년 12월이었고 현재 “실질적 사형제 폐지국"으로 분류된다고 하네요 [1]. 사형을 시행하는 나라들조차도 보다 인도적인 사형 방법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사형수가 느끼는 고통을 최소화하면서, 최대한 짧은 시간에 죽음에 이르게 하고, 신체에 남는 상처 등을 최소화하려 노력합니다. 약물 투약같은 것이 듣기에는 잔인해도 생각보다 괜찮은 형 집행 방법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상처라곤 주사 자국 하나만 남고, 약간의 마취 후 고통 없이 보내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극심한 고통을 가하는 전기 의자나, 몸에 상처를 남기는 총살이나 교수형보다 약물에 의한 사형이 더 “인도주의적"인 방법이라는 얘기입니다.
신명기 본문이 말씀하는 사십대까지 용인하는 태형도 마찬가지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비인도주의적이고 잔인한 것 같아도, 본 율법이 지향하는 바는 형량의 한계를 정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본다면 인도주의적 제도인 셈입니다. 3절 후반부는 이를 방증합니다. “... 만일 [사십대를]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 범죄자가 태형에 합당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가 여전히 네 형제인 것을 기억해야 하며, 그가 저지른 범죄의 흉악한 정도가 인간으로서 그가 지닌 존엄성을 잊게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일견 현대의 독자들을 당황시킵니다. 형이 자식 없이 죽어서 형수가 과부가 되면, “형제 된 의무를 다 행해야"한다고 말씀하는데, 이는 형수와 잠자리를 가지라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8장의 다말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유다의 장자 엘은 다말과 결혼한 뒤 자식없이 죽습니다. 둘째 아들 오난은 형수와 합방은 하지만 형제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땅에 설정합니다. 쾌락은 취하고 의무는 져버린 이 행위를 성경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했다"고 말씀합니다(창 38:10). 결국 오난도 죽고, 다말은 자구책을 마련해서 시아버지였던 유다를 통해서 아들을 낳습니다.
계대결혼(levirate marriage)이라 불렸던 이 제도는 역사속에서 종종 관찰되던 풍습이었습니다. 고구려에도 형사취수제라고 불렸던 비슷한 풍습이 있었다고 하지요. 당시에 여성들은 토지나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갖지 못했고, 이는 과부가 된 형수가 재산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고, 보호받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또한 만일 형수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면 가문의 재산이 다른 집으로 넘어가게 되거나, 소유권이 명백하게 규정되지 않고 붕 뜨게 되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계대결혼 제도는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는 아들이 없는 미망인을 보호하면서 그 집안의 재산권을 보호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현대 문화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형제 된 의무"의 배경은 바로 보호였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는 이런 점에서 정말 은혜롭습니다. 남편도 잃고 아들도 없이 보호받지 못하는 신세에서 시아버지와 동침함으로 인생역전한 다말이라는 여인이 등장하고(일종의 계대결혼), 또 계대결혼을 통해 자기 인생도 바꾸고 가문도 살린 룻이라는 모압 여인도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율법이 꿈꿨던 약자에 대한 관심과 보호가 성육신이라는 사건을 통해 재조명 된 것이지요. 보호를 받아야 하는 약자가 하나님의 역사에 당당히 동참하고 쓰임받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고후 3:6). 로마서 2장에도 말씀합니다. “오직 [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니라 ...” 율법이 쓸 데 없다거나 폐기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조문에 매이지 말고 오히려 그 안에 담긴 정신을 보고 계승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우리는 조문을 뛰어넘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으로 새 사람이 된 우리는 그러므로 새 언약의 일꾼입니다. 낡은 언약에 매이지 않고, 오히려 그 정신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살리는 사람들입니다.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고 품는 사람들입니다.
[1] "대한민국의 사형제"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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