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 신앙과 기독교 복음
- 황선웅 (Isaac)
- Feb 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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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 신앙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안타깝게도 무속 신앙에 대한 동경은 과학과 기술의 세기를 넘어 정보의 세기까지 진출한 듯 하다.
무당 무(巫)
무당을 뜻하는 巫자의 유래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지만, 생긴대로 풀면 쉽다. 하늘을 뜻하는 평행선과 땅을 뜻하는 평행선 사이에 선 인간이 바로 무당이다. 하늘과 땅은 무당에 의해 비로소 이어진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인간 매개체, 즉 인간의 뜻을 하늘에 전달하고 반대로 하늘의 뜻을 인간 세상에 펴는 이가 무당이다. 왜 기독교가 그토록 격렬히 무속 신앙에 반대하는지 이 글자에서 분명해진다.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세상은 경계가 없는 곳이었다. 하늘과 땅의 경계도, 하나님과 인간의 경계도 없었다. 창세기가 낙원이라 칭하는 그곳이었다. 하지만 타락 이후 인간은 그 동산을 상실했다. 천사들과 화염검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인간을 막아섰고, 하나님과 인간은 분리되었다. 하늘과 땅이 평행선처럼 분리되어 중재자가 없이는 서로 통할 수 없는 세상, 바로 巫자가 가정하는 세상이다.
기독교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분리를 해결하셨다고 말씀한다. 십자가는 땅 위에 선 거대한 더하기(+) 표시가 되어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다시 열었다. 휘장은 찢어졌고, 폭력적 제국의 압제 하에 있는 인간 세상과 지성소의 은혜의 자리(속죄소 혹은 시은좌)가 서로 마주보게 되었다. 예수님이 새 무당으로 등극하신 것이 아니다. 하늘과 땅의 분리라는 도식이 깨지고 누구나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통로가 열린 것이다.
기독교는 무당의 존재를 온 몸으로 부정해 왔다. 필요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독교 역사 가운데 교회의 구조나 직제가 무당 역할을 했던 적이 있었다. 성인들의 유물이 무당 역할을 한다고 믿었던 적도 있었고, 자기가 무당임을 자처하면서 신천지를 선포했던 박수 무당들이 있었다. 방언을 해야 혹은 세례를 받아야 천국에 간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무속적인 것으로 만든다.
신령 령(靈)
신령 령(靈)자는 무당(巫)이 입을 열어 하늘의 비를 구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한자 문화권에서 영(靈)적인 것은 상승의 의미를 내포했던 것 같다. 靈자는 땅에 사는 인간이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무속의 힘을 빌어 하늘에 닿고자 했던 시도를 포착해 내고 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영이 인간 세상을 향해 하강해 오셨다고 말씀한다. 요한복음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던 하나님의 말씀(logos)에 대해 증거하며, 모세에게 소명을 주시는 하나님은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겠다고 말씀하신다(출 3:8). 계시록이 끝까지 아껴 둔 최후의 비전도 마찬가지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계 21:2). 하나님의 영은 끊임없이 아래를 향해 움직이신다. 그래서 성령의 바람은 산 아래를 향해 불어 내리는 바람이다. 부정한 권위를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게 무너뜨리는 바람이시고, 가장 낮은 자에게까지 좋은 소식을 전하시는 하강의 영이시다. 하나님은 등산 보다는 스키 타는 것을 좋아하신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하강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떨쳐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묵상하는 것이지, 점괘를 뽑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생각해 보라. 하나님은 각 사람의 미래를 딱 정해 놓고 우리가 스무고개를 풀듯 정답을 찾아가길 원하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결정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고 내 주변의 사람들을 섬길 수 있는 길인지 기도하면서 분별하길 원하신다. C.S. 루이스는 우리가 자유로이 하나님을 선택하고 사랑할 때에만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자유의지에 따르는 커다란 위험을 감수하시면서까지 우리에게 자유라는 선물을 주신 이유였다.
하나님이 주신 이 귀한 선물, 값지게 사용해야 한다. 하늘을 우러러 보며 비가 오기만을 빌지 말고, 우리의 마음을 적시는 그 은혜를 기억하며 내 이웃들을 꽃피우는 빗물이 되어야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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